선사진(宣沙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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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곽산 선사포에 설치한 첨사진.

개설

선사포(宣沙浦)는 평안도 선천과 곽산 사이에 왜변에 대비하여 설치한 첨사진이다. 인조대 초반 일시적으로 진을 폐지했다가 1636년(인조14) 다시 첨사를 파견함으로써 복설했다. 이후 웅진(雄鎭)이라 일컬어지며 중국으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조선 사신이 잠시 머무는 곳이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선사포는 선천과 곽산 사이에 있다. 또한 이곳은 중국의 금복주(金復州)와 마주 대하고 있다. 선사포에 진을 설치한 것은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선사포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의주도첨절제사(義州道僉節制使)가 거느린 배 15척, 군사 1,100명이 이곳에 있었다. 수영은 1445년(세종 27) 포구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서락포(西洛浦)로 옮겨졌다. 선사포는 왜구가 자주 침몰하는 지역은 아니었다. 게다가 중종대 이후 노략질이 줄어들면서 진을 이설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정묘호란을 겪은 이후에 관방시설로서의 기능보다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신들이 잠시 쉬어가는 장소로서 기능하였다. 이 시기 선사포는 웅진이라고 일컬어졌다(『중종실록』 4년 9월 29일).

변천 및 현황

선사포진은 인조대 정묘호란으로 혁파했다가 1636년(인조 14) 3월 평안병사유림이 노강진(老江鎭)과 함께 첨사를 다시 설치하기를 청해 선사진첨사가 설치되었다(『인조실록』 14년 3월 8일). 1676년(숙종 2) 3월 철산의 가도(椵島)가 조선의 요충인데도 진이 설치된 바가 없으니 선사포첨사를 가도로 옮겨 보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경작할 땅이 없고 근처의 둔전도 부족하여 논의가 정지되었다(『숙종실록』 2년 10월 7일).

형태

선사포에는 성이 없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5년(인조 3) 4월 사은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이덕형(李德泂), 부사오숙(吳䎘) 등이 중국에서 돌아와 선사포에 정박하였다. 당시 요동이 후금의 세력하에 있어서 조선과 명의 외교관계는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요로가 선사포였다(『인조실록』 3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