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石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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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던져 승부를 가르는 편싸움 놀이.

개설

음력 정월 보름 전후 혹은 단오에 편을 나눠 싸우는 단체놀이이며 향전(鄕戰)의 일종이다. 돌을 던지는 놀이라는 의미로 석척희(石擲戲) 혹은 싸워서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 돌싸움이라 불리기도 한다. 혹은 ‘편싸움’이라는 의미로 편전(便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이두식 표현으로 보인다. 편전이라고 하면 곧 석전과 동일시될 정도로 편싸움 놀이의 대표적인 놀이였다. 향전의 일종인 횃불싸움·줄다리기·차전놀이 등의 편싸움 양상이 격해지면 석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석전은 이기는 편이 속한 지역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로 인해 단순 놀이를 넘어 격렬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종종 상대편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일이 발생해 나라에서는 금지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석전은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로서, 그 시작은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고려전(高麗傳)」에 의하면, 고구려 때에는 매년 연초에 패수(浿水: 현 대동강)가로 군중들이 모여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는 것을 두세 차례 하다가 그치는 국가적 행사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이것을 석전의 시초로 보았다.

석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한 모의 전쟁놀이 혹은 전쟁연습을 하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석전은 전쟁 연습을 하는 모의전투 놀이로 성행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1555년(명종 10) 호남에 왜구가 출몰하여 석전군(石戰軍)을 차출해서 보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명종실록』 10년 5월 27일). 석전이 행해지는 단체놀이들이 대체로 놀이이자싸움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모의전투설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처음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투 연습의 일종으로 행해지다가 이후 점차 격렬한 편싸움으로 변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인 상원(上元) 전후와 단오 날에 서울을 비롯해 김해, 안동 그리고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석전 놀이가 행해졌는데, 서울에서는 상원보다는 단오에 석전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참여 인원이 수백 명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히 큰 단체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전은 그 놀이만 단독으로 벌어지기도 했고, 횃불놀이나 줄다리기 혹은 차전놀이와 같은 향전에서도 본 놀이 후 싸움이 격해져 석전이 부수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석전놀이는 부상자 발생 등 폐해가 많아 국가에서 의금부(義禁府)를 시켜 금지시켰는데도 근절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1438년(세종 20)에는 이와 관련하여 종친 등이 단오에 석척희를 금지한 법령을 지키지 않은 것을 두고 당사자에 대한 탄핵과 징계 조치가 이루어졌다(『세종실록』 20년 5월 19일).

이후 조선후기에 들어 영조의 강경정책에 의해 점차 사라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1771년(영조 47) 영조는 석전을 금하는 법을 어긴 자에게는 가장 중한 죄를 적용하여 엄중하게 곤장을 치는 종중결곤(從重決棍)을 행하게 하였다(『영조실록』 47년 11월 18일).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석전은 향전율(鄕戰律)로 다스렸는데, 이는 석전이나 차전과 같이 법으로 금한 것을 어기고 향전을 행한 자에게는 곤장 100대를 치고 귀양을 보낸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놀이는 위험성이 높아 종종 다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석전은 고려에 이어 조선초기 태종의 생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하게 행해졌다가 태종 사후부터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던 듯하다. 그로 인해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위험성이 높은 향전을 행할 경우 태형을 가하고 여기에 귀양까지 보낸다는 규율을 정책적으로 펼쳤다.

놀이도구 및 장소

순수하게 석전만을 하는 경우에는 손에 잡힐 만한 크기의 돌이 준비된다. 그런데 석전에 이 돌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몸싸움이 일어날 때는 막대기나 몽둥이 등도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사람이 상하거나 심지어 사망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석전은 대체로 인접한 마을끼리 혹은 특정하게 정해진 지역에서 편싸움을 하는 놀이라서, 마을의 경계지역인 길 혹은 하천에서 서로 대치하여 돌을 던져 싸웠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서울에서는 숭례문(남대문)·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 이 삼문(三門) 밖의 사람과 아현(阿峴) (현 아현동) 사람들이 편을 가른 다음 만리현(萬里峴: 현 만리동)으로 가서 석전을 하였고, 안동에서는 지역 내의 사람들이 중계천(中溪川)을 경계 삼아 좌우 양편으로 나뉘어 석전놀이를 하였다.

놀이 방법

석전은 좌우로 편을 나누어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반대편의 영역으로 돌을 던져 상대편에게 위협을 가하는데, 돌이 무서워 뒤로 후퇴하는 편이 패배하게 된다. 이 때문에 물러서지 않으려고 상대편에서 돌이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맞아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편싸움이 보다 격해지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고 혹은 부상을 입은 채로 계속 공격하며 석전을 그치지 않았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민간에서는 석전에서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그 반대로 아현 편이 이기면 다른 도들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용산과 마포 사람들은 아현 편을 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전회통(大典會通)』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신당서(新唐書)』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신문·잡지편(1876~1945)』,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현대신문편(1946~1970)』, 2006.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 김명자, 「한국 세시풍속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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