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용(石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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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로 진상되어 일상의 음식과 제찬의 음식 재료로 사용되던 석이과의 버섯.

개설

석이버섯은 나무나 땅에서 서식하는 다른 버섯과 달리 깊은 산중 암벽 표면에 자라는 지의류(地衣類)의 일종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자라서 채취가 어려운 재료이다. 특유의 검정색 때문에 음식의 고명과 부재료로 유용하게 쓰인다.

원산지 및 유통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강원도의 회양(淮陽)과 간성(杆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95개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산지는 평안북도·함경남도·강원도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영지(靈芝)이며, 명산(名山)의 돌벼랑에서 난다.”라고 하였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우리나라 금강산의 석이버섯이 소개되어 있다. 또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고려사(高麗史)』 「조이전(趙彝傳)」에 반란을 일으켜 원으로 도망갔던 김유(金裕)가 원의 승상(丞相)안동(安童)의 편지를 가지고 고려로 다시 들어와 금강산에서 나는 석용(石茸)을 보내 달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써 석이버섯의 식품과 약품으로서의 애용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품질 좋은 금강산의 석이버섯은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바위에 붙어 자라는 면은 진한 검정색으로 융 같은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얇은 이파리모양이다. 오래 자라 큰 것은 지름이 7~8㎝가 넘지만, 주로 말려서 건조된 상태로 유통되므로 부서져서 작은 것이 많다.

연원 및 용도

공기와 접하는 바깥 면은 암갈색으로 이끼가 끼어 있고, 바위에 붙어 있던 곳은 딱딱한 돌처럼 모래가 뭉쳐 있다. 그러므로 먼저 따뜻한 물에 불려서 바깥면의 이끼를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헹궈서 이물질을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것을 다시 바싹 말려서 가루를 내어 두고 찹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든다.

허균(許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표훈사의 주지가 만들어 준 석이병은 맛이 매우 좋아 경고(瓊糕: 두텁떡), 시병(柹餠: 감떡)보다 낫다고 하였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술 빚는 법』, 『이씨음식법(李氏飮食法)』, 『규합총서(閨閤叢書)』,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의 고조리서에는 석이가루를 찹쌀가루와 섞어 찐 석이병이나 석이단자가 기록되어 있다.

석이버섯이 많이 나는 곳에서는 참기름에 볶고 소금 간을 하여 나물로 먹기도 하였다. 이것을 매월당김시습(金時習)은 소고기반찬보다 더 향기롭고 맛있다고 하였다. 『추강집(秋江集)』「유천왕봉기(遊天王峰記)」에는 지리산에 나는 감·밤·잣은 과일로 쓰이고, 인삼·당귀는 약재로 쓰이고, 곰·돼지·사슴·노루·산나물·석이버섯은 반찬으로 쓰인다고 하였다. 고명으로 쓸 때는 돌돌 말아 가늘게 채 썰어 떡 위에 수를 놓거나 음식에 올려 멋을 더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에는 궁의 각 처소에 공상된 물목에 석이버섯의 양과 금액이 기록되어 있어 일상식과 제찬에 이용되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석이버섯은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에도 빠지지 않는 물품이었다(『성종실록』 9년 12월 21일).

생활민속 관련사항

깊은 산속에만 있는 석이버섯의 채취는 밧줄을 타야 가능한 극한의 작업이었다. 『하당집(荷塘集)』에는 영춘현(永春縣) 백성들이 공물로 부과된 석이버섯을 채취하느라 겪는 고통에 대해 적은 「석용설(石茸說)」에 대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석이버섯은 차고[寒] 평(平)한 성질이 있고, 맛이 달며[甘], 독이 없다고 하였다. 먹으면 속을 시원하게 하고, 위를 보호하며, 지혈작용을 한다. 또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하고, 장수할 수 있는 식품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동의보감(東醫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본초강목(本草綱目)』
  • 『성호사설(星湖僿說)』
  • 『술 빚는 법』
  • 『시의전서(是議全書)』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이씨음식법(李氏飮食法)』
  • 『하당집(荷塘集)』
  • 『여씨춘추(呂氏春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