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안성)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서운산에 있는 절.

개설

통일신라초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혜거 국사, 태원 등이 중창하였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세조로부터 교지를 받으며 부역을 면제받는 등 조정의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절을 인조 때 해원이 크게 중창하였고, 영조 때 화덕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680년(신라 문무왕 20)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 876년(신라 문성왕 18) 선종 구산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 염거(廉居) 국사(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혜거(慧炬) 국사(國師)가 중창하여 수백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후기인 1265년(고려 원종 5) 태원이 중창하였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안성 석남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안성 석남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하는 사찰이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세조가 직접 친필 교지를 내려 석남사 승려들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석남사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80년(선조 13) 선조로부터 40근의 황금을 섞어 만든 200근의 청동 범종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소실되었고 하사받은 범종도 사라졌다. 해원(海源)이 1649년(인조 27)부터 10여 년간 중건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1753년(영조 11) 화덕(華德)이 중수했다. 이후 석남사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현대

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

석남사 대웅전(石南寺 大雄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식 구조로 조선후기의 목조 건물이다. 대웅전의 숫기와에서 "옹정 4(3)년 을사 3월일 조성(雍正 四(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석남사 영산전(石南寺 靈山殿, 보물 제823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함께 모시고 있다. 1562년(명종 17)에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했다.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막새 기와에서 "1725년(영조 1) 기와를 바꾸었다[飜瓦]"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石南寺 磨崖如來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은 높이 7m, 너비 6.5m 정도의 자연 암벽에 양각된 입상으로, 불상의 크기는 높이 4.5m, 너비 2.8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이어서 조성 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석남사석탑(石南寺石塔, 안성시 향토유적 제19호)은 2기의 석탑으로 고려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考)』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