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生薑)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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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생강 |
한글표제 | 생강 |
한자표제 | 生薑 |
대역어 | 새앙, 새양 |
관련어 | 건강(乾薑), 백강(白薑)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차경희 |
수확시기 | 상강(霜降) 즈음인 10월 하순~11월 초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생강(生薑)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9년 윤8월 2일, 『정조실록』 24년 6월 27일, 『영조실록』 41년 10월 10일, 『중종실록』 39년 5월 15일, 『세종실록』 9년 4월 26일, 『세조실록』 6년 4월 19일, 『중종실록』 19년 3월 3일, 『중종실록』 7년 5월 9일, 『정조실록』 1년 5월 5일, 『성종실록』 10년 6월 10일, 『세종실록』 13년 8월 24일 |
식용·약용으로 널리 사용하는 다년생 식물의 땅속 덩이줄기.
개설
생강은 독특한 맛과 향이 있어 파, 마늘과 함께 한국음식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조미료이다. 맵고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몸이 차거나 풍한과 습한 기운이 있을 때 유용한 약재로도 쓰인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인도와 말레이시아의 고온다습한 열대지역이다. 20∼30℃에서 잘 자라는 고온성 작물로 열대지방에서는 꽃을 피우는 다년생작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피우지 않아 1년생 작물로 재배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현종의 하사품에 생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생강을 식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일부 지방과 전라도 18개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생강은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다음이 담양과 창평의 것이라고 하였다. 『택리지(擇里志)』에는 전주의 생강은 생산량이 많고 질이 좋아 조선후기까지 전국의 수요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다. 당시 전주의 일부 상인들은 생강을 기반으로 하여 전국을 누비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윤8월 2일).
연원 및 용도
생강은 생것을 쓰기도 하지만, 11월 이후 수확을 한 후에는 토굴에 저장을 하거나 가공하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의하면 껍질이 있는 채 저절로 마른 것을 건생강(乾生薑)이라 하고, 껍질을 벗겼으나 경양(經釀)하지 않아 빛깔이 흰 것을 백강(白薑)이라 하였다. 생강을 쌀뜨물에 하룻밤 담가 두었다가 대나무칼로 껍질을 긁어내고, 다시 하룻밤 담갔다가 건져 볕에 말리기를 반복하여 쌀가루를 발라 볕에 말려 건강(乾薑)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생강은 오랫동안 안심하고 식용과 약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생강은 담을 삭이고, 풍습을 없애고, 기를 내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궁의 약방에서는 건강이나 강계(薑桂)를 늘 구비하고 왕의 감기나 기침을 다스리는 약으로 사용하였다(『정조실록』 24년 6월 27일). 영조는 술 대신 생강차를 올리도록 하여 자주 마셨다(『영조실록』 41년 10월 10일).
『논어(論語)』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정신을 소통시키고 구취(口臭)를 제거하기 위해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여, 왕이나 세자가 신하들에게 생강을 하사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9년 5월 15일).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집(四佳集)』에 생강에 대한 시가 8편이나 있다. 생강은 구강과 위 점막을 자극하여 소화효소 분비를 촉진시키므로 식욕증진의 효과가 있고, 항염증·항구토 효과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음식을 할 때 생강을 다지거나 즙을 내거나 혹은 가루를 내어 넣으면 독특한 맛과 향을 낸다. 이는 생강의 매운맛 성분인 진저롤(gingerrol)과 쇼가올(shogaol) 때문으로, 특히 육류의 누린내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김치를 담글 때는 특유의 풍미를 주고, 젓갈의 나쁜 냄새를 잡는 역할을 한다. 또한 생강을 이용하여 생강란, 생강정과, 편강, 생강차 등의 과정류와 음료를 만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몸을 덥게 하므로 겨울철에 더욱 좋은 음식들이다.
생강은 종묘제례 때 두(豆)에 담는 제수이며, 궁중의 혼인례 때 찬품으로도 쓰였다. 궁에서 세자의 길례(吉禮) 때 세자빈을 맞는 빈조현의(嬪朝見儀)나 공주나 옹주의 혼례 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처음 뵙는 예인 현구고(見舅姑)에서 조율반(棗栗盤)과 함께 생강과 계피 등을 섞어서 만든 육포를 담은 단수반(腶脩盤)을 반드시 올렸다(『세종실록』 9년 4월 26일)(『세조실록』 6년 4월 19일)(『중종실록』 19년 3월 3일).
생활민속 관련사항
생강은 매운 성질 때문에 때로는 금기시되기도 하였다. 시묘살이를 할 때는 오신(五辛)을 먹지 않고(『중종실록』 7년 5월 9일), 기우제를 지낼 때도 여훈(茹葷)을 먹는 것을 금지하였다(『정조실록』 1년 5월 5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을 다녀오거나, 사신으로 다녀온 이들이 일본이나 중국 등 이웃나라에서도 생강을 재배하고, 음식에 이용하는 풍속을 본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10년 6월 10일). 명(明)과 청(淸)의 외교물품으로도 쓰였다(『세종실록』 13년 8월 24일).
참고문헌
- 『도문대작(屠門大嚼)』
- 『사가집(四佳集)』
- 『산림경제(山林經濟)』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택리지(擇里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