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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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수신앙 성지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오대산에 있는 절.

개설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가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참선결사가 개설된 수행도량이었다. 조선초기에는 태조와 세조 등 국왕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국가의 수륙재를 열었고, 문수보살을 봉안하는 등 문수신앙의 명맥을 이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한암(漢岩) 스님이 죽음을 무릅쓴 용맹함으로 절을 유지하였다. 세조와 문수보살과의 인연을 간직한 문수동자상, 고양이상 등이 유명하다.

내용 및 변천

(1) 신라~고려시대의 상원사

705년(신라 성덕왕 4) 진여원을 창건하였다. 이때 성덕왕은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영변(靈卞) 등 5명에게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여 『화엄경』을 강독하도록 하였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섬을 바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고려후기인 1381년(고려 우왕 7) 무렵에 이색(李穡)이 지은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를 통해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다. 1376년(고려 우왕 2) 절은 승당조차 없을 정도로 퇴락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옹의 제자 영로암(英露菴)과 판서(判書)최백청(崔伯淸) 부부가 힘을 모아 1년여 만에 승당을 완공하였다. 승당이 갖추어지자 승려 33명이 모여 10년간의 참선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 수행을 행한 지 5년째인 1381년 촛불이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밝아지는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2) 조선시대의 상원사

조선시대 들어 상원사는 국왕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정치 이념을 내세우며 불교를 탄압하였지만 국왕과 왕실은 돈독한 신앙심으로 여러 사찰의 중창을 지원하였다.

상원사는 조선 건국 초부터 국가가 주관하는 법회를 자주 개설하였다. 태조는 1398년(태조 7) 8월에 천재지변을 물리치는 법석(法席)을 상원사에 개설하도록 하였다. 1401년(태종 1) 봄 태종은 상원사의 사자암(獅子庵: 현 중대암)을 중창하였다. 태종은 불사가 완공된 후, 그해 11월에 친히 행차하여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또한 권근(權近)에게 중창기를 써서 오랫동안 후세에 알리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절에서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개설하였다(『태종실록』 1년 10월 2일). 수륙재는 뭍과 물의 외로운 영혼을 천도하는 영혼 천도 의식이다. 1395년(태조 4) 10월 삼화사(三和寺)·관음굴(觀音堀)·견암사(見巖寺) 등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국가가 주관하는 수륙재를 개설하였다(『태조실록』 4년 2월 24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몰살시킨 고려 왕족의 명복을 기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조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몰살시킨 고려 왕족들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이후 삼척 삼화사에 큰 불이 나서 수륙재 설행이 불가능해지자, 국가에서는 상원사를 수륙사로 지정해 매년 2월 15일에 국행수륙재를 지속적으로 개설하게 했고, 1414년(태종 14)부터는 1월 15일에 개설하도록 날짜를 변경하였다(『태종실록』 14년 2월 6일). 이와 같이 상원사는 국가의 수륙재도량으로서 건국 초부터 국가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있었다.

상원사는 세조(世祖)의 중창으로 다시 한 번 명찰로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466년(세조 12) 세조는 절에 나한전, 청련당, 종각 등을 건립하고 절의 각종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가 김수온(金守溫)이 쓴 「상원사중창기(上元寺重創記)」에 전한다. 1462년(세조 8) 4월 세조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왕대비는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의 조언을 듣고 세조에게 화재로 불탄 상원사의 중창을 권하였다. 세조는 왕실의 재원을 하사하여 불사를 명하고, 친히 공덕소(功德疏)를 지어 종친과 신하들에게 시주를 권하였다. 당시 신미가 쓴 「상원사중창권선문(上元寺重創勸善文)」은 지금까지 남아 보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세조는 불사가 완성되자 친히 낙성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거나 신령한 고양이가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다음 해 예종은 상원사를 세조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로 정했다. 그리고 절을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잡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예종실록』 1년 2월 14일).

조선후기인 1788년(정조 12)의 상원사 전경을 전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단원김홍도는 이 해 9월 오대산과 금강산 등을 답사하며 70여 장의 산수화를 그려 『금강사군첩』을 남겼다. 이 중에 상원사와 월정사, 중대 적멸보궁, 사고(史庫) 등의 그림이 들어 있다. 김홍도가 그린 상원사는 지금의 문수전을 중심으로 좌우의 행랑칸과 2층 누각, 요사 등의 단출한 가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조선후기 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3) 근현대

근현대에 들어 상원사는 참선도량으로 거듭났다. 1904년에 선원을 개설하였고 1907년 수월 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방한암이 수행하면서 상원사는 오대산의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선사는 1925년 상원사에 들어와 1951년 입적할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에 나가지 않고 참선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한암의 죽음을 무릅쓴 상원사 수호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1951년 1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거점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오대산의 전 사찰을 소각시키고 상원사도 불태우려 하였다. 이때 한암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입고 법당으로 들어가 좌정하고는 자신도 함께 불태우라고 하였다. 스님의 인품에 감화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태우고 돌아갔다.

1984년에는 문수동자상의 복장물이 발견되어 절의 위상과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은 2개의 발원문과 복식, 전적류 등 23점(보물 제793호)인데 발원문에는 세조의 둘째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에 이 동자상을 문수사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 『목은집(牧隱集)』
  • 『식우집(拭疣集)』
  • 한국불교연구원, 『월정사 (부)상원사』, 한국불교연구원 편, 1977, 일지사.
  • 한상길, 『한국의 명찰 5 월정사』, 대한불교진흥원, 2009.
  • 강호선,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6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 신종원, 「신라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 『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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