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약(山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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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에 속하는 다년생 덩굴성 식물인 마 또는 참마의 덩이뿌리.

개설

덩굴성 초본식물의 덩이뿌리로 공모양으로 길쭉한 형태인데, 품종에 따라 크기·모양·빛깔이 다양하다. 조선에서 식용과 약용으로 이용하였으며, 구황작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마, 서여(薯蕷), 산우(山芋), 토서(土薯), 산저(山藷), 옥연(玉延)이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중국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백제 무왕이 어린 시절에 마를 캐어 팔며 살아 서동(薯童)으로 불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국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약(山藥)은 산기슭에서 자라는데, 특히 참마는 중부 이남의 산기슭에서 자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산약은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의 12개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서여는 평안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서 산약은 경상도에서 약재로 진상되었으나, 1864년(고종 1)~1894년(고종 31)에는 8월 말에서 9월 초에 아직 충실하게 자라질 못해 제 시기에 진상되지 못한다는 내용이 12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조선전기에 통신사(通信使) 박서생(朴瑞生)이 유구국(琉球國)을 방문하고 보고하기를, 그곳에는 서여라는 것이 있는데 큰 것은 기둥만 하고 작은 것은 서까래만 하다. 남만(南蠻)에서 얻어다가 재배하고 있는데, 이를 채취해 오게 하여 그 재배를 널리 보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종류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조선시대에는 구황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연원 및 용도

송나라의 약물학자 구종석(寇宗奭)에 따르면, 산약의 원래 이름인 서여가 당(唐)나라 대종(代宗)의 이름이 예(預)였기 때문에 피휘(避諱)하여 薯藥(서약)으로 바꾸었고, 그 후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이름이 서(署)였으므로 다시 이를 피휘하여 결국 산약이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는 옛날 중국에서 여러 나라의 싸움으로 정세가 어지러울 때 싸움에 져서 군사들이 산으로 도망갔다. 군사들은 산속에 숨어 있는 동안 뿌리가 굵고 맛이 좋은 약초를 파서 먹으며 견뎠는데 이 뿌리를 산에서 우연히 만난 약초라는 뜻에서 산우(山遇)라고 했으며, 산에서 몸을 보하는 약이라는 의미로 산약(山藥)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산약은 식용과 약용으로 이용된다. 식용은 캔 것을 생으로나 찌거나 익혀서 이용하고, 약용은 가을에 덩이뿌리를 캐서 물에 씻은 후 자르거나 쪄서 햇볕에 말려서 쓴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산약수제비[山藥撥魚]와 마떡[山芋餺飥]을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산약가루를 찹쌀가루와 섞어서 쪄서 매향병을 만들었고, 산약을 부재료로 넣어 백설기·복령조화고·구선왕도고 등의 떡을 만들었다.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에 기록된 마단자는 “산약은 동대문 근교에서 난 것이 좋은데, 빛이 노랗다. 마는 굵은 것을 무르게 쪄서 껍질을 깨끗하게 벗기고 찧어서 걸러라. 꿀에 반죽하여 가운데를 얇게 파고 잣가루와 강즙을 쳐서 소를 넣어 만두 모양이나 주악 모양으로 둥글게 하거나 임의로 빚어 다시 백청을 발라서 잣가루를 묻혀라.”라고 하였다. 이렇게 만든 마단자는 효도찬합에 넣었다. 또 마다식은 “다식을 박으려면 잡것 없이 그냥 박되 티와 잡것이 묻기가 아주 쉬우니 판을 특별히 깨끗이 닦아라. 또 깨끗한 도마에 반반하게 다져 편편하게 해 놓아라. 잘 드는 칼로 각이 지게 칠보 모양으로 잘라서 통잣을 삶아 박으면 두드러진다. 백설기에 박듯 쪼개서 서넛씩 박아 쓴다. 마다식은 날이 지날수록 되고 윤기가 없어서 곧바로 한 것만 못하니 내일 쓰려거든 오늘쯤 만들겠지만 쉬기가 쉬워 오래 두지 못한다.”고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산약은 몸이 쇠약해진 것을 보충하여 기력을 좋게 하고, 비위(脾胃)를 보충하여 권태감, 무력감, 음식감소, 설사 등을 다스린다. 또한 폐음(肺陰)을 보충하여 해수·천식·가래를 없애고, 당뇨, 허리와 무릎 시린 증상, 유정, 조루증,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 등에 효과가 있다. 약리 작용으로는 장관활동 자극, 혈당 강하, 항노화 작용 등이 보고되어 있다. 오랫동안 복용하면 눈과 귀가 밝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배가 고프지 않고 수명을 늘린다. 마에는 양질의 단백질과 당질 만난(mannan)이 함유되어 있으며, 소화가 잘되기 때문에 갈아서 생식을 하기도 한다.

『승정원일기』인조 10년 6월 8일의 기사에 의하면, 인조가 약물을 복용한 후 부작용이 있자 의관은 필시 중기가 매우 허하고 열기가 성하여 이처럼 갑자기 설사하는 증세가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산약죽(山藥粥)에 볶은 찹쌀가루를 넣고 얼음을 띄워 올리고 탕약은 다시 밤사이의 증후를 살피고 나서 상의하여 아뢰겠다고 하였다. 인조대에는 산약죽이나 연자산약죽(蓮子山藥粥)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인조 10년 6월 10일의 기사를 보면, 특히 대전에 올리는 연자산약죽의 단맛을 보충하기 위해 사탕이 필요하므로 평안감사민성휘(閔聖徽)에게 힘닿는 대로 무역하여 보내게 할 것을 내의원(內醫院) 도제조(都提調)가 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산약은 궁중의 내의원에서 올리는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팔물탕(八物湯), 가미지황탕(加味地黃湯), 가감삼향산(加減蔘香散) 등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옥담시집(玉潭詩集)』에 실려 있는 「산약(山藥)」을 주제로 읊은 시에서 그 효능을 추측할 수 있다.

서여가 산골짜기서 자라니 / 薯蕷生山谷

긴 뿌리가 정말 기이하여라 / 長根異且奇

땅을 파서 금빛 줄기 뽑고 / 掘地抽金柱

쟁반에 올릴 땐 흰 살을 깎지 / 登盤削玉肌

삶아서 늙은이 배를 채우고 / 融烝充老腹

죽을 끓여 허약한 기운 돕는다 / 乾粥補虛羸

장복하면 몸이 가볍고 건강하다니 / 久服身輕健

신선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 / 癯仙豈我欺

생활민속 관련사항

『음식방문(飮食方文)』에 기록된 연수함춘주(延壽含春酒)는 마를 부재료로 넣고 과실류와 생강, 살구씨 등에 생꿀을 합하여 탄알만큼 환을 만들어서 하루에 두세 환씩 먹으면 늙지 아니하고 굶주리지 아니하고 백발이 흑발로 바뀔 것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동의보감(東醫寶鑑)』
  • 『산림경제(山林經濟)』
  • 『옥담시집(玉潭詩集)』
  •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 『음식방문(飮食方文)』
  • 정담편집부, 『한의학대사전』, 도서출판 정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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