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서(司倉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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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평안도·함경도 창고에서 전곡(錢穀)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종6·7품의 지방 관서.

개설

조선초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변방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큰 고을에 토관직(土官職)을 설치했다. 사창서는 지방 군현의 전곡의 출납과 창고를 간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원래 대창서(大倉署) 등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1407년(태종 7) 사창서로 개편하였다.

설립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변방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큰 고을에 토관직을 설치했는데, 사창서는 지방군현의 전곡(錢穀)의 출납과 창고를 간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고려 때부터 토관직이 있었던 평양부의 경우, 조선 건국 이후 이를 계승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영흥부는 1407년(태종 7) 설치되었는데, 관원은 종6품 영(令), 종7품 승(丞), 종8품 직장(直長), 종9품 녹사(錄事)가 각 1명씩이었다. 함흥은 1434년(세조 16)에 설치되었는데, 관원으로는 종6품 영 1명밖에 없었다. 같은 해 함경도·평안도 각 고을의 토관 관직의 품계를 통일하였다. 1436년에 사창서가 설치된 경성부에는 종7품 사창서 주부 1명, 1446년 설치된 강계에는 종7품 승 1명, 정8품 녹사 2명의 관원이 근무했다.

조직 및 역할

사창서가 설치된 지역은 함경도의 영흥·영변·경성·회령·경원·종성·온성·부령·경흥, 평안도의 평양·의주 등지였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 사창서에 소속된 관원의 품계가 달랐다. 영흥부·평양부·영변대도호부·경성도호부의 경우 사창서는 종6품 아문으로 종6품의 감부(勘簿), 정8품 관사(管事), 종9품 섭사(攝事) 각 1명이 있었다. 의주·회령·경원·종성·온성·부령·경흥·강계는 종7품 아문으로 종7품의 장사(掌事), 종9품 섭사 각 1명이 있었다.

변천

함경도와 평안도 큰 고을에 설치된 사창서는 모든 지역에 일률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고을별로 시차를 두고 설치되었고, 관원의 명칭과 폐지 시기가 지역마다 달랐다. 전주와 경주에도 1457년(세조 3) 설치되었다가 1452년에 폐지되었다. 개성에는 1465년에 설치되었으나, 1469년(예종 1)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 이재룡, 「조선초기의 토관에 대하여」, 『진단학보』29·30, 1966.
  • 吉田光男, 「一五世紀朝鮮の土官制」, 『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