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언(四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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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句)가 4자로 이루어진 고체(古體)의 한시.

개설

사언체(四言體)는 선진시대 『시경』의 주요 형식이었다. 이후 『시경』이 한나라 때 이르러 경전의 반열에 오르자, 사언의 형식 또한 시가에서 정체(正體)로 인식되었다. 그에 따라 『시경』을 전범으로 하는 사언시의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사언시는 상고시대의 이언시(二言詩)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이언구가 중복되어 사언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언시는 두 박자로 이루어진 ‘2+2’의 대칭 구조를 주요 형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시경』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공자(孔子)가 『시경』을 시의 전범으로 여겨 제자를 교육하는 주요 과목으로 삼으면서, 제례(祭禮) 때나 풍간(諷諫)할 때, 송축할 때에도 사언시를 선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모화관에 행차하여 손수 사언시를 짓기도 했다(『영조실록』 41년 9월 10일) (『영조실록』 45년 4월 4일).

내용 및 변천

『시경』 305편은 「상송(商頌)」 5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나라 때의 작품으로, 사언을 정체로 하고 있으며 간혹 삼언이나 오언, 또는 잡언체가 섞여 있다. 한나라 초기에도 사언체의 작품이 보이지만, 한나라 무제 때에 이르러 오언의 시체가 나옴에 따라 사언시는 쇠퇴했다.

이후 후한 때는 『시경』을 전범으로 한 사언시와, 『시경』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내용과 풍격을 읊은 사언시가 두루 창작되었다. 삼국시대의 사언시는 완적(阮籍)과 혜강(嵇康)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완적은 13수, 혜강은 16수의 사언시를 남겼는데, 『시경』의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진시대에는 『시경』을 전범으로 하는 사언시가 중흥기를 맞이했다. 서진 50여 년 동안 활약한 시인 70여 명의 시 550여 수 가운데 사언시가 무려 180여 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진시대에는 도잠(陶潛)이 『시경』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과 감정을 좀 더 자유롭게 펼쳐 보이는 수준 높은 사언시를 창작하였다. 이후 남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가 문학관이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사언시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언은 조정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왕과 신하가 지은 것이 많은데, 『영조실록』 기사에는 왕이 손수 사언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하사했고 신하들도 사언시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는 내용이 보인다(『영조실록』 39년 10월 25일) (『영조실록』 40년 8월 15일).

참고문헌

  • 노경희, 「陶淵明 詩語의 淵源 -四言詩를 중심으로-」, 『인문학지』27집,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3.
  • 최우석, 「古代 四言詩와 唐代 律詩 속의 ‘雅正’ 審美觀」, 『중국어문논총』26집, 중국어문연구회, 2004.
  • 『漢語大詞典』, 漢語大詞典出版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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