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斯文亂賊)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유교의 학설과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여 일컫는 말.

개설

사문(斯文)은 『논어(論語)』「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이 문[斯文]’을 없애려 하였다면 뒤에 죽는 내가 이 문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라고 한 데서 비롯한 말이다. 공자가 양호(陽虎)로 오인받아 광(匡) 땅의 사람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니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이후 사문(斯文)은 유도(儒道)를 가리키거나 유학자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였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사문 즉 유도를 어지럽히거나 유학자를 비난하는 경우 쓰이게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서 남인이나 소론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명분으로 쓰였다. 노론 계열은 주자성리학을 묵수하고 강화하면서, 양명학, 노장학뿐만 아니라 주자의 해석에 반대하거나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에도 이단시하고 사문난적으로 탄압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문난적은 특히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후기에 정적을 비난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주자의 『중용장구』를 개정한 남인 학자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숙종실록』 13년 2월 4일). 사문난적으로 규정되면 그의 후손이나 친구들도 불리한 처벌을 받았다. 예컨대 1839년(헌종 5)에 윤경규(尹敬圭)를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주자와 송시열을 모신 영양(英陽)의 운곡서원(雲谷書院)을 훼철(毁撤)하였던 윤광안(尹光顔)의 아들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헌종실록』 5년 2월 18일). 또한 1851년(철종 2)에는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權敦仁)이 사문난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정이천의 『역전(易傳)』, 주자의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비판하여 사문난적으로 규정된 송능상(宋能相)을 옹호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철종실록(哲宗實錄)』 2년 9월 9일).

고종대에는 천주교 등 서학을 옹호하는 경우 사문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1881년(고종 18) 수신사(修信使)김홍집(金弘集)이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가지고 들어오자, 이만손(李晩孫) 등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그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책에서 주장하는 바도 문제일 뿐더러 그 책의 저자인 황준헌이 자진해서 예수를 믿는 사문난적의 앞잡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 이유였다(『고종실록』 18년 2월 26일). 이후로도 한용석(韓容奭)이나 유지영(柳智永)이 송시열의 이름을 부르고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6년 8월 30일). 이처럼 조선후기는 성리학이 교조화되고 노론이 권력을 잡으면서 정자나 주자, 심지어는 송시열을 비판하는 경우에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성토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