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론(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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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과 고위 관인·명현 등의 행적에 대한 사관(史官)의 평론.

개설

역사서는 사실(史實)과 사론(史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사론이 "태사공이 말하기를[太史公曰]"이란 형식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좌구명도 『춘추좌씨전』에서 "군자가 말하기를[君子曰]"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기술하였다. 사실과 사론을 구분하면서, 열전(列傳)이나 본기(本紀)의 끝에 자신의 견해를 기재하는 방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사마광의 지휘로 편찬된 『자치통감』 역시 전통적인 사론 방식을 따랐다. 『자치통감』 중 당나라 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던 범조우(范祖愚)는 그 경험을 살펴 당나라 시대에 대한 사론만으로 책을 남겼다. ‘당나라를 거울로 삼는다’, ‘당나라의 역사’라는 의미인 『당감(唐鑑)』이 그것이다. 『당감』이 최초의 사론서이기는 하지만, 사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먼저 제시하고 논평을 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사실과 사평을 함께 기록하되 둘을 섞지 않고 구분하여 기술하는 전통은 변치 않고 유지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계승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사』에는 중국의 정사가 본기·열전·연표·지의 말미에 사론을 기술한 것과는 달리 세가에만 이제현 등의 논찬이 있는 경우에만 인용하여 기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는 상소·사건·논의된 정사 등을 제시한 다음에 그에 대한 사관의 논평인 사론을 부기하였다. 그 사례를 하나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명종 연간에는 문정왕후가 권세를 잡고 그의 동생 윤원형 등이 나라를 어지럽히면서 백성들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단해졌다. 고단한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유리걸식하면서 임꺽정과 같은 큰 도적도 생겨났다. 조정에서는 임꺽정을 잡기 위한 방책이 논의되었는데, 사관(史官)은 그러한 논의를 쭉 사실대로 기술한 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 내어 권력 있는 자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아가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는 것이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명종실록』14년 3월 27일)라고 사론을 기술하였다. 적절하고 핵심을 찌르는 사론이라고 하겠다.

변천

『고려사』 세가에 실린 사론은 고려 역대를 통틀어 태조에서 숙종대까지의 15편과 그 이후의 왕에 대한 18편으로 총 33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있어서는 『태조실록』부터 "사신이 말하기를[史臣曰]"로 시작하는 사론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성종실록』부터 사론이 일상화되면서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사림(士林)들이 한림 천거제를 이용하여 성종 때부터 대거 사관직에 진출하였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고, 사관 기능의 강화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하였다. 또 고려말부터 계속된 유교 교육의 진흥과 학문 장려책으로 관료들의 지적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사관의 비판 의식이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즉, 제도의 강화와 정치 세력의 성격 및 사회적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조선왕조실록』의 사론이 증가한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사론의 발달은 역사 편찬이라는 사학사의 전통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편년체 통사인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신(臣) 사마광은 말하기를[臣光曰]"이라는 자신의 사론 117편 외에 100편 정도의 다른 사상가나 역사가의 사론을 실었다. 『자치통감』을 이어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45명의 역사가나 사상가의 사론 930여 편을 실었다. 이는 『자치통감강목』의 분량이 『자치통감』의 2/3 정도로 추산되는 점을 고려하면, 사론의 양이 6~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세종대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 훈의(訓義: 주석)가 완성되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사론을 기재하는 방식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원고사』를 보면 포폄의 서술에 ‘강목’이란 말이 나온다. 문장으로만 보면, 포폄을 강목으로 만든다는 말로 보이지만, 실제 문맥상으로는 중요한 연혁과 시비를 강(綱)으로 하고, 주사(奏事)와 수말(首末: 전모) 및 포폄(褒貶)을 목(目)으로 정리하라는 말이다. 『성종실록』의 ‘사신 왈’의 형식으로 된 사론 증가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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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에서 『자치통감강목』에 이르는 시기 중국 성리학자들이 역사 비평의 방법으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사림들도 성종대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사론을 왕성한 현실 비판의 통로로 삼지 않았나 한다.

이는 고려말 이래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그 대표적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을 주체적으로 이해한 결과였다. 중국 명나라와는 달리, ‘사신 왈’로 표현되는 사론이 『자치통감강목』처럼 통사가 아닌 당대사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형식으로도 확립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초기 관료 체제 내에서 사관이 갖는 독립적 위상과 사관들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기울인 창의적 노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자치통감(資治通鑑)』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변태섭, 『고려사의 연구』, 삼영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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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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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오항녕,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상징성과 편찬관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6, 2003.
  • 차장섭, 「조선 전기 실록의 사론」, 『국사관논총』32, 1992.
  • 한우근, 「조선 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66,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