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四端七情)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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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단칠정 |
한글표제 | 사단칠정 |
한자표제 | 四端七情 |
관련어 |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이이(李珥),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이기호발(理氣互發) |
분야 | 문화/인문학/유학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이형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단칠정(四端七情)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3년 5월 11일, 『효종실록』 1년 2월 22일, 『효종실록』 9년 12월 17일, 『현종개수실록』 4년 5월 25일, 『숙종실록』 7년 9월 30일, 『정조실록』 20년 11월 8일 |
한국 성리학의 심성론에서 정으로 발현한 사단과 칠정에 대한 조선중기의 리기론적 해석.
개설
성리학에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정(情)이다. 정은 외부에 감응하여 발현한 것이나, 그 발현한 결과에 따라 사단과 칠정으로 분류된다. 이를 리기론적으로 해석하면서 논쟁한 것이 바로 사단칠정론이다.
이황은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천명도(天命圖)」를 감수하면서 도설에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한 것을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하여 리기호발론(理氣互發)을 주장하였다. 이를 본 기대승(奇大升)은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이의를 제기하며 리기공발(理氣共發)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수정은 이황 자신의 리기호발설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더욱 견고하게 한 것이었다. 두 사람 서로의 논쟁은 8년 동안 이어졌는데, 당시 학자들은 두 사람의 학설에 대한 시비보다는 연장자 이황의 학문을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혼(成渾)은 인심도심(人心道心)에 의거하여 이황의 리기호발설이 옳은 듯하다고 이이(李珥)에게 질의하였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라고 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의 리기호발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조선중기 사단칠정에 대한 리기론적 탐구는 사단칠정론을 심화시키고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 즉 퇴계학파(退溪學派) 또는 영남학파(嶺南學派)가 형성되고, 또 한쪽에서는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 즉 율곡학파(栗谷學派) 또는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형성되면서 한국 성리학은 심화 발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성리학에서 성(性)과 정(情)의 관계는 성발위정(性發爲情)에 의거한다. 성발위정을 풀이하면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이다. 발현한 정은 사단과 칠정으로 분류된다. 발현한 사단과 칠정을 리기론적으로 해석하면서 논쟁이 있게 되었다.
조선 명종 때 성리학자 정지운(鄭之雲)은 「천명도(天命圖)」를 저술하고 그 도설에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하였다. 그는 「천명도」에 대한 감수를 이황(李滉)에게 부탁하였다.
이황은 도설에서 언급한 것을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하였다. 이를 본 기대승(奇大升)은 리와 기의 불리적 원칙 즉 리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관점에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에 분속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으로서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칠정은 성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 것이어서 병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황은 리와 기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리기불상잡(理氣不相雜)의 관점에서 성을 본연(本然)과 기질(氣稟)로 나눌 수 있음을 들어 정(情) 또한 리와 기로 나눌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 기대승처럼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은 성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하지만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의 차이에 말미암는 것으로 보며, 리와 기의 호발이 아니라 공발(共發)임을 강조한다.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 것이다."라고 수정하였다. 이는 리와 기가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엇을 위주로 표현하느냐를 언표한 것으로 여겨, 이황 자신의 리기호발설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기대승은 「사단칠정총론」을 지어 이황의 소종래(所從來)의 관점에서 사단과 칠정을 분속하는 것을 수긍하나,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하여 악(惡)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기의 발현이라고 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으면 리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사단과 칠정이 종국에는 다르지 않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황은 1568년(선조 1) 왕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도 수정설을 그대로 언표하였다. 이황은 리발과 기발을 모두 인정하는 리기호발설에 입각하여 사단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은 선과 악이 아직 정해지지 않음 또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황은 이에 의거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등을 엄격히 분속시켜 나가는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은 8년 동안 이루어졌지만, 결론을 보지 못한 채 일단락되었다.
이이는 "사단은 칠정을 모두 겸하지 못하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함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단을 리발, 칠정을 기발이라고 분속하는 이황의 리기호발설을 잘못된 견해로 본 것이다. 즉 사단과 칠정 모두 감촉하는 것은 모두 외부의 느낌이며 이러한 느낌은 동정하는 기이기 때문에 ‘기가 발함에 리가 탄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이황의 리발을 부정하고 리발에 해당시켰던 사단을 칠정이 포함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이의 주장은 천지 사이에서 동정하는 모든 현상이 기이기 때문에 천지의 조화나 인심의 발용도 ‘기가 발함에 리가 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이는 ‘기가 맑으면 리는 발현된다’는 기청리현(氣淸理顯)으로 전개시켜, 사단을 맑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 것으로 간주하여 본 것이다. 이것이 기발리승일도설이나, 이이는 그렇다고 해서 기가 리보다 앞선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이는 "발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는 소이는 리이다[發之者氣也 發者所以氣也]"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이이는 이에 의거하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인심과 도심, 천리와 인욕 등을 이황과 같이 엄격하게 분속시키지 않고, 본연지성은 기질지성 가운데 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심이나 도심은 천리가 기의 엄폐와 엄폐하지 않음에 따라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인조대에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여 명이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며 "두 사람은 오현(五賢)을 뒤이어 태어나서 도학을 강명(講明)하여 오묘한 이치를 발휘하였습니다. 무릇 리기이합(理氣離合)·사단칠정 등의 학설은 여러 선유들의 논리와 서로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하여 분석해 보면 귀추에 가서는 가려진 것을 밝히고 빠진 것을 보완하여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을 확충하고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을 바로잡았습니다."라고 하여, 리학의 근원이 밝혀졌음을 언표하였다(『인조실록』 13년 5월 11일).
변천
조선후기 효종대에 경상도의 진사(進士)유직(柳稷) 등 900여 명은 이황의 리기호발설이 주희의 정론을 명백하게 계승하였는데 이이에게서 배척당한 것을 들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였다(『효종실록』 1년 2월 22일). 효종은 옥당의 강관을 불러들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당시 송시열(宋時烈)이 사단칠정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이황의 수정설을 말한 다음 이이의 학설에 대해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해 이가 타는 것인데 사단은 기에 엄폐되지 않은 것이고 칠정은 기에 엄폐되어 이가 주재(主宰)하지 못하는 것을 겸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효종실록』 9년 12월 17일). 현종대 관학의 유생 이적(李積) 등은 남중유(南重維) 등이 이이와 성혼을 헐뜯은 것을 변론하면서 이이의 학설이 이황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정자(程子)를 존숭했지만 경전을 다르게 해석한 것에 비유하여 상소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5월 25일). 또한 사단을 리발, 칠정을 기발이라고 분속하는 이황의 리기호발설은 리와 기의 불리적 측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이가 지적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숙종실록』 7년 9월 30일).
정조대에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면서 "도(道)와 기(氣)가 하나로 섞여 있다고 주장한 여러 학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단연코 내쳤고 리와 기의 사단칠정에 관한 변론은 동지들의 의심을 후련하게 풀어 주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1월 8일).
참고문헌
- 『퇴계전서(退溪全書)』
- 『고봉전서(高峯全書)』
- 『율곡전서(栗谷全書)』
- 『우계집(牛溪集)』
- 윤사순, 『한국유학사-한국유학의 특수성 탐구』, 지식산업사, 2012.
- 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 『현상윤의 조선유학』, 심산,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