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첩산(婢妾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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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양인 남성이 비자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취하여 낳은 자녀.

개설

비첩산(婢妾産)은 양반과 양인이 비자(婢子)를 취하여 낳은 소생이다. 양인 인구와 노비 인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종모법·종부법을 교대로 사용하면서 이들의 신분 귀속을 양인으로 할 것인지, 천인으로 할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왕의 친족이나 벼슬아치 등을 아버지로 둔 경우 종량(從良)·속신(贖身) 등의 혜택이 따르기도 했으나,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내용 및 특징

양인 남성, 특히 양반이 자기 소유의 계집종을 첩으로 삼는 자기비첩(自己婢妾)이나 타인 소유의 계집종을 첩으로 삼는 타인비첩(他人婢妾)을 두게 되면서 그 비첩이 낳은 비첩산의 신분 귀속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첩산 역시 천인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신분이 높은 경우 그 소생을 쉽게 천인으로 만들지 못하였다. 그 중 종친(宗親)의 비첩산은 조선초기부터 양인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양반 비첩산에 대해서는 종부법(從父法)과 종모법(從母法)이 번갈아 시행되었다. 종부법은 태종대에 사대부 또는 양인의 비첩산에 대하여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량(從良)시키는 방안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세종대에 와서 종부법은 폐지되고 종모법으로 환원되었다. 단, 품관이나 문무과 출신 등이 40세가 넘도록 비첩산 외에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종량시켜 주도록 세조대에 결정하였다.

그 밖에 일반 비첩산의 경우 종량 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신 속신(贖身) 규정을 두었다. 『경국대전』에 정착된 속신 규정은, 2품 이상의 자기비첩의 아들은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삼고, 그 이하 5품까지는 공사 천첩을 자기 비자(婢子)속신(贖身)하도록 허락한 태종대의 조치에서 비롯되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4일). 이 밖에도 양반과 천첩 사이의 소생에 대하여 보충군(補充軍) 입속을 통해 군역을 치른 뒤 양인이 되게 하는 규정도 마련되었다.

사대부가에는 수많은 비첩산, 즉 얼자(孽子)가 존재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재산 상속분은 얼자의 경우 적중자녀(嫡衆子女) 몫의 1/10을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신전 상속 등에 있어서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또 양반 자제지만 어머니의 신역(身役)을 이어받아 노비 신분을 계승하고 다른 양반의 소유물로 사환·상속·매매되는 경우도 있었다. 서얼 허통의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조선후기에도 그런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 비첩산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변천

태종대에는 비첩산을 영구히 방면하여 양민(良民)으로 삼아 사재감 수군에 채우도록 하였다(『태종실록』 5년 9월 6일). 이후 1415년(태종 15)에 보충군이 설치되면서 보충군에 입속하였다. 그 뒤 보충군은 1468년(세조 14)에 비가양부소생(婢嫁良夫所生)에 대한 종부법(從父法)의 실시로 일시 폐지되었으나, 종량법이 폐지되면서 1469년(세조 15)에 보충대로 개칭되어 부활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배재홍, 「조선시대 천첩 자녀의 종량(從良)과 서얼 신분 귀속」, 『조선사연구』3, 1994.
  • 이상백, 「‘천자수모(賤者隨母)’ 고(考): 양천교혼(良賤交婚) 출생자의 신분 귀속 문제」, 『진단학보』25·26·27, 1964.
  • 이성무, 「조선 초기 노비의 종모법과 종부법」, 『역사학보』115,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