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飛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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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단이 바람에 희끗희끗 나부끼듯 생동하는 필세를 형용한 필획의 현상.

개설

비백(飛白)은 특정한 서체의 종류라기보다는 흰 비단처럼 희끗희끗 묘연한 필획과 바람에 나부끼듯 생동하는 필세가 있는 독특한 필획의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필획과 필세로 쓰인 글씨를 비백서(飛白書)라고 하는데, 이는 가볍게 나부끼듯 하면서 묘연한 분위기가 나는 장식 서체의 일종이다. 동한(東漢)시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채옹(蔡邕)이 썼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팔분(八分)에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전서와 장초·해서·행서·초서 등 여러 서체에서 모두 쓰였다. 남겨진 작품은 많지 않으나 제왕들이 쓴 제액(題額) 글씨에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내용 및 특징

비백에 대한 내용은 중국 역대의 시문(詩文)에 상당히 있으나 대부분 추상적으로 기술되어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전해오는 묵적도 극히 드물다.

비백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송대(宋代)황백사(黃伯思)는 『동관여론(東觀餘論)』 「논비백법(論飛白法)」에서 “실같이 피어나는 곳을 백(白)이라 하고, 날아오를 듯한 세를 비(飛)라 한다.”고 하였다. 남조송나라의 시인 포조(鮑照)는 「비백서세명(飛白書勢銘)」에서 “팔법(八法)을 초월하고 육문(六文)의 진기함을 다하였다. 새와 용이 하늘을 날고 여의주가 샘을 가르는 것 같다. 안개같이 가볍고 구름처럼 무겁다. 필봉과 검을 꺾고 나는 화살 같고, 놀라듯 튀어 오르는 물수제비 같고 잽싸게 돌아 나는 기러기 같다. 가파른 데서 마디가 꺾이고 중간은 험한 데를 오르는 것 같다. 모서리마다 별처럼 빛나고 표일하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비백서’는 서체라기보다는 흰 비단처럼 희끗희끗 묘연한 필획과 바람에 나부끼듯 율동감이 있는 필세로 쓰인 독특한 풍격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또 마치 줄에 걸어놓은 흰 비단이 춤을 추듯 바람에 펄럭이며 마르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백(飛帛)’이라는 미칭이 따르기도 한다.

당대(唐代)장회관(張懷瓘)의 『서단(書斷)』에 의하면 비백서는 후한시대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 “영제(靈帝)가 희평(熹平) 연간에 채옹에게 「성황편(聖皇篇)」을 지으라는 조서를 내렸다. 채옹이 이것을 지어서 임금님께 바치려 홍도문에 들어서는데 때마침 대문을 단장하고 있었다. 장인이 빗자루에 백토를 묻혀 쓸듯 글씨를 썼는데, 채옹이 이것을 좋게 여겨 집에 돌아와 필법을 연구하여 비백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것을 모방하여 한때 유행하기도 하였다.

변천

초창기에는 휘날리는 형세보다 희끗희끗한 현상이 중시되다가, 남조제(齊)나라의 소자운(蕭子雲)이 희끗희끗한 현상보다 휘날리는 기세를 살려 비백서를 쓰면서부터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예서에서 쓰이다가 전서로 응용되고, 당송(唐宋)시대부터는 초서·행서·해서 등 여러 서체로 확산되었다.

위진(魏晉)시대에 비백서로 유명한 서예가로는 위탄(韋誕), 왕이(王廙), 갈홍(葛洪),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왕승건(王僧虔), 소자운 등이 있다. 당대(唐代)에는 태종과 고종, 측천무후가 비백서로 유명하다. 당 태종의 「진사명(晉祠銘)」과 「범수기공송(氾水紀功頌)」, 측천무후의 「승선태자비(升仙太子碑)」 등이 있다. 송대(宋代)에 비백서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태종(太宗)과 인종(仁宗), 조황후(曹皇后), 문동(文同), 황백사, 채양(蔡襄)이 있다. 이후 서예에서 비백서가 점차 사라져 인장이나 도화서(圖畵書)에서 가끔 응용되었다. 조선의 민화에서 보이는 문자도(文字圖) 역시 비백서를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양신방 저, 곽노봉 역, 『중국서예80제』, 동문선, 1997.
  • 대구서학회, 『서예란 무엇인가』, 중문출판사, 1992.
  • 陶君明, 『중국서론사전』, 호남미술출판사, 2001.
  • 梁披雲 외, 『중국서법대사전』, 서보출판사, 1985.
  • 周俊杰 외, 『서법지식1000제』, 하남미술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