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의(焚黃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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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魂殿)에서 중국 사신에게 전해 받은 고명(誥命)을 누런 종이에 베껴 쓴 뒤 이를 읽고 불태우는 의식.

개설

혼전에서 중국 사신이 시호가 적힌 문서인 고명을 왕에게 전하는 의식인 사시의(賜諡儀)를 마치고 중국 사신의 영접관인 태평관(大平館)으로 돌아가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누런 종이에 고명을 베껴 써서 고명함(誥命函) 뒤에 놓는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인 예찬(禮饌)을 갖추어 3명의 헌관(獻官)이 차례로 잔을 올린 후 고명을 베껴 쓴 누런 종이를 불사르는 장소[燎所]에서 태우고 곡(哭)을 한다. 고명의 원본은 고명함에 넣어 보관한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분황의(焚黃儀)의 의례 절차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의례가 끝난 뒤 축판과 폐백을 처리하는 방식이 변경되었다. 1757년(영조 33)에 영조는 이전처럼 혼전 의례에서 사용한 축판과 폐백을 묻어 구덩이에 쌓아두는 것이 불결하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비판에 따라 중국의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의 예서(禮書)를 참조하여 축판과 폐백을 그대로 구덩이에 묻는 대신 구덩이 위에서 태우고 재를 묻는 것으로 변경하였다(『영조실록』 33년 5월 26일).

절차 및 내용

분황의는 혼전에서 거행하였는데(『문종실록』 1년 1월 26일), 혼전은 왕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안장한 후 국장 기간 동안 신주인 우주(虞主)와 연주(練主)를 모시는 곳이다. 왕이 승하(昇遐)하면 몸에서 떠난 혼(魂)이 깃들 곳을 만드는데 왕의 재궁을 능(陵)에 모신 뒤에 만드는 것이 우주이다.

의례를 거행하기 전에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몸을 정결히 하는 재계(齊戒)를 행한다. 제례에 쓰는 음식인 예찬(禮饌)은 졸곡제(卒哭祭)를 지낼 때와 같게 준비하여 의례를 시작하기 전에 진설한다. 국장 기간의 예찬은 봉상시(奉常寺),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에서 3일씩 돌아가면 준비한다. 사시의가 끝나면 승문원 관원이 누런 종이에 고명을 베껴 고명함 뒤에 놓아둔다. 집례가 왕과 잔을 올리는 헌관 및 종친과 문무백관 등 참석자의 자리를 설치한다.

시각이 되면 의례에 참석하는 사람 모두 봉례랑(奉禮郎)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왕을 모시던 판통례(判通禮)가 예를 행하기를 아뢰면 재전(齋殿)에 있던 왕은 지팡이를 짚고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의례는 곡(哭), 지곡(止哭), 전폐례(奠幣禮),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분황, 곡, 지곡, 예필(禮畢), 납우주(納虞主), 예(瘞), 사배(四拜)의 순으로 진행한다.

곡은 소리 내어 우는 것이고, 지곡은 곡을 그치는 것이다. 전폐례는 준비한 폐백을 영좌(靈座) 앞에 올리는 것이다. 폐백을 영좌 앞에 놓기 전에 먼저 3번 향을 올리고, 울창주(鬱鬯酒)를 제기인 찬(瓚)에 받아 땅에 부어 강신(降神)한다. 이후 폐백을 영좌 앞에 올리고 대축(大祝)이 고명을 읽는다. 초헌례는 영좌 앞에 첫 번째 잔을 올리는 것으로 왕이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이 된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는 정1품 관원이 각각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되어 진행한다. 분황은 종헌례를 마치면 대축이 요소(燎所)에서 고명을 불태우는 것이다. 분황을 마치면 다시 곡하다 그치고 4번 절한다. 예필은 의례가 끝났다고 외치는 것이다. 찬례(贊禮)가 예필을 아뢰면 왕은 재전(齋殿)으로 돌아가고 헌관과 종친 및 문무백관도 절하는 자리인 배위(拜位)에서 4번 절하고 나간다. 대축이 영좌에 설치했던 우주를 다시 들여 놓고 제사에서 사용한 폐백과 축문을 구덩이에 묻는다. 전사(殿司)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예찬을 거두어 나간다(『세종실록』오례 흉례 의식 분황의).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신명호,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6.
  • 안희재, 「조선시대 국상의례 연구-국왕국장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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