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北漢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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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숙종대에 북한산 일대에 축성한 산성.

개설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위치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변천

삼국 사이의 쟁탈 대상지로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백제 개루왕 5)에 축조한 것이다. 여기서 백제의 주력군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정군(北征軍)의 중심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북한산성을 포위, 함락하여 475년(백제 개로왕 21) 왕을 죽이고 백제의 도성을 유린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러나 553년(신라 진흥왕 14)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어기고 백제의 영토인 한성(漢城) 지역을 점령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세워진 것이다.

603년(신라 진평왕 25) 8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자 진평왕 자신이 1만의 군사로써 이를 구원하였다. 또한 661년(신라 태종무열왕 8) 5월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인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20여 일간 포위하여 쌍방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은 2,800인의 군민(軍民)과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성을 방어하였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에 치러진 것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통일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성주 동타천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에서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로 승급하였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齋宮)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고려 고종 19)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고려 우왕 13)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 성으로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대대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

1659년(효종 10)에 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북한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로 하여 도성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 성의 축성이 누차 논의되긴 하였으나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玩)이 강화도·남한산성은 비상시에 의지할 지대가 아님을 극론하였고 이후로 여러 신하들과 수차 상론한바, 먼저 기지(基址)를 시찰시키고, 여러 신하들에게 방안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 음력 10월 훈련대장이기하(李基夏)와 어영대장김석연(金錫衍)으로 하여금 북한산성 축성의 가부를 가서 살피고 오라 하자 이기하는 돌아와 보고하기를 험하기가 남한산성은 비할 바 아니며 도성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이런 형세의 지대를 버릴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고, 여러 신하도 이에 동의하는 수가 많아졌는가 하면, 특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유(李濡)는 강력히 이를 지지했다. 그리고 총융사(摠戎使)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이우항(李宇恒)도 성의 터를 시찰하고 돌아와 찬성의 뜻으로 보고하자 1711년(숙종 37) 음력 2월에 비로소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음력 3월에 축성의 착수를 명하니 음력 4월에 시작하여 음력 9월에 완료하고, 이듬해에 임금이 행차하였다. 이 산성은 전시에 임금이 거처하고, 만일의 경우 도성의 백성도 수용함을 목적으로 하여 축조하였다.

형태

성의 규모는 둘레 7,620보(步)로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柴丹峰) 위의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 또한 이듬해에 지은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이 있고,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황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女墻)은 허물어졌으나 성채는 잘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성부사(京城府史)』
  • 『文化財大觀』, 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1976.
  • 김용국, 「肅宗朝北漢築城考」, 『향토서울』8,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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