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봉수(北路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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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함경도 경흥 지역 서수라보 우암(牛巖)에서 시작하는 제1봉수로와 평안도 강계 지역 만포진 여둔대(餘屯臺)에서 출발하는 제3봉수로 및 함경도 의주 지역 고정주(古靜州)에서 시작하는 제4봉수로에 속한 여러 봉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 5개의 봉수 노선 가운데 제1봉수로와 제3봉수로 및 제4봉수로에 속한 봉수를 북로봉수라고 한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북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433년(세종 15)부터 많은 수의 봉수가 설치되었다. 즉, 압록강 상류의 4군(郡)과 두만강 하류 남안의 6진(鎭) 설치를 계기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성격을 지닌 연대(煙臺)를 다수 설치한 것이다. 노선에 의한 구분상 제1봉수로는 6진, 제3봉수로는 4군의 설치와 관련이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국초인 세종 연간에 봉수망을 새로 확정하고 내지봉수(內地烽燧)와 연변봉수의 구체적인 시설 기준을 마련하는 등 그 역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봉수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후 계속된 전란을 통해 폐단이 노출되면서 파발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북로봉수가 위치한 북방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봉수가 4군 6진을 포함해 압록강부터 두만강 연변까지 넓게 산재해 있어, 인적·물적 보급과 시설 유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봉수는 대개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주 낄 뿐만 아니라 날이 흐리면 잘 보이지 않아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63년(현종 4)에 왕이 북로봉수가 여러 차례 상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관하는 자를 추고하여 다스리게 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6월 22일). 또 1684년(숙종 10)에는 특별히 선전관정상주(鄭翔周)·백시구(白時耉)·김중삼(金重三) 등을 보내 북로봉수를 살피게 하였다. 이때 정상주 등은 연로(沿路)의 봉대(烽臺)가 대개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장비나 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의정부에서 신칙(申飭)하여 수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숙종실록』 10년 8월 14일). 1695년(숙종 21)에는 무관 이빈(李穦)이 북로봉수의 소홀한 점을 상세히 아뢰고 변통할 것을 청하였다(『숙종실록』 21년 4월 1일).

변천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북로의 봉수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대책을 논의하는 등 국가 경영의 근간으로서 지속적으로 관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烽燧制)가 중지되고, 이듬해에 각지의 봉대(烽臺)와 봉수군(烽燧軍)이 폐지됨에 따라 북로봉수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참고문헌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