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釜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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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부산포 부근에 축조하였으며 현재 성곽만 남은 성.

개설

조선시대 부산에 축조했던 성이다. 동래도호부사의 지휘 아래 부산포진첨사가 지휘했다. 성안에는 130여 명의 상주군(常駐軍)이 있었고 6척의 군선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말과 조선초기 왜구 방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초기부터 왜인과 교류하고 무역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기도 해서 군사적 역할이 강조되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군과 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관(倭館)의 성내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특히 왜인들은 왜관을 부산성 안으로 이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조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위치 및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포성(富山浦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돌로 만든 성으로 둘레 511.8m, 높이 4m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성의 위치는 동래현으로부터 남쪽으로 20리(약 8㎞)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산진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동래도호부사의 지휘 아래 부산포진첨사가 지휘했다.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을 때에는 둘레가 1,689자(512m)이고 높이가 13자(4m)이었다고 한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鄭公壇) 터가 성의 남문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부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첫 교전이 일어난 곳이다. 당시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대규모 선단을 보고도 조공하러 오는 왜인이라 여기고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들의 정체가 조선을 침입하는 적군임을 파악하고 돌아와서 방어하고자 했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에 왜군이 이미 부산성을 오르고 있었다. 정발은 군사를 이끌고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전사하고 말았다. 다음 날에는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되고 부사송상현(宋象賢)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후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해서 김해(金海)·밀양(密陽) 등의 부(府)를 함락했다. 병사이각(李珏)은 왜군을 막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도망갔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2백여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냈기 때문에 여러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서도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柳成龍)은 경상도 방어를 위해 부산성을 산 위에 개축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부산성을 산 위에 개축해야만 동래성도 함께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경상도 방어를 위해 거제·가덕(加德)·천성(天城) 등에 큰 진영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연대(煙臺)를 만들자고 건의했다.

유성룡은 조선의 봉화군(烽火軍)이 봉화를 멀리 전하지 못하는 것은 불을 피우고 난 후 즉시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은 연대가 서로 바라보이는 거리에 있고 처자를 거느리고 그곳에서 살기 때문에 연대가 멀리까지 통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경상도와 부산의 형세가 방어하기 어렵지만 부산을 중심으로 성을 개축하고 부산성으로부터 동래·김해·웅천에 이르기까지 중진(重鎭)을 설치한다면 적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선조실록』 28년 7월 8일). 당시 유성룡이 부산성을 경상도와 부산 지역 일대의 군사 방어체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곳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관의 위치를 부산성 안에 둘 것인지 밖에 둘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관을 잠시 부산성 안에 설치해 두었는데, 비변사에서는 경상좌수사와 부산첨사가 모두 부산성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왜인과 섞여 거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상소했다. 따라서 부산성 밖에 빨리 건물을 지어서 왜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해야만 보안 등의 문제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비변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상순찰사와 경상좌수사에게 조치하도록 지시했다(『선조실록』 39년 9월 17일).

선조의 조치에 대한 왜인들의 반응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인조대에 이르러 대마도주는 부산성을 조선에서 쌓은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쌓았다고 주장하며 왜관의 성내 이전을 요청했다(『인조실록』 18년 5월 15일). 이후에도 왜인들은 인조와 효종의 재위기를 거치는 동안 비슷한 논리를 펼치며 왜관의 부산성 내 이전을 거듭해서 강력하게 요구했다(『인조실록』 22년 7월 12일)(『효종실록』 10년 3월 7일).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정보 보안 문제와 일본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태에서 왜관의 부산성 내 이전이라는 왜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