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군(烽燧軍)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봉수군 |
한글표제 | 봉수군 |
한자표제 | 烽燧軍 |
상위어 | 봉수(烽燧) |
동의어 | 봉졸(烽卒), 봉군(烽軍), 봉화간(烽火干), 봉화군(烽火軍), 봉대직(烽臺直), 간망군(看望軍), 간망인(看望人), 후망인(堠望人), 해망인(海望人), 연대군(煙臺軍), 요망군(暸望軍) |
관련어 | 감관(監官), 감고(監考), 망한(望漢), 봉군보(烽軍保), 봉무사(烽武士), 별장(別將), 봉장(烽將), 오장(伍長), 요망장(暸望將), 빙역(氷役) |
분야 | 정치/군사·국방/통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 세조, 고종 |
집필자 | 김주홍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봉수군(烽燧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22년 12월 1일, 『세종실록』 28년 10월 6일 |
조선시대에 봉수를 유지·관리하면서 봉화를 올리는 일인 거화(炬火)를 맡아보던 군사.
개설
봉수군은 조선시대 봉수 운영의 주체였다. 봉수나 연대에 속한 봉수군은 다른 역(役)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로지 후망(堠望)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근무 여건이 매우 열악하고 힘든 고역이자 천역이었다. 한때는 다른 역에 비해 덜 고되다 하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봉수군이 되려 하기도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예컨대 영조대까지도 겨울에는 빙역(氷役)을 담당할 정도로 잡역이 많은 역이었다(『영조실록』 22년 12월 1일).
1785년(정조 9)에 반포된 『대전통편』에서는 봉수군을 감독하는 오장(伍長)을 봉수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봉수군의 신분은 법제상 양인(良人)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봉수군을 가리키는 용어는 문헌에 따라 봉졸(烽卒)·봉군(烽軍)·봉화간(烽火干)·봉화군(烽火軍)·간망군(看望軍)·간망인(看望人)·후망인(堠望人)·해망인(海望人)·연대군(煙臺軍)·봉무사(烽武士)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 해망인과 연대군은 특히 연변봉수(沿邊烽燧)에서 근무한 봉수군을 가리킨다.
봉수군은 대개 5명이 번(番)을 이루어 교대로 근무하였다. 또한 이들은 매달 10일에 근무 기록을 일기(日記)·청명일기(淸明日記)·음청일기(陰晴日記)·풍변일기(風變日記) 등의 이름으로 해당 고을의 수령에게 보고해야 했다.
봉수군의 인원과 근무 상황은 『세종실록』과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 등의 법전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우선 경봉수인 목멱산(木覓山)에 있던 남산봉수의 경우, 1446년(세종 28)에는 20명의 봉수군이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5개소의 봉수에 각 2명씩 입직하였다(『세종실록』 28년 10월 6일). 『경국대전』이 반포된 뒤에는 봉수마다 봉수군 4명, 오원(五員) 2명씩 총 30명이 배치되었다.
조선후기에 목멱산의 봉수장(烽燧將)이었던 충순위군(忠順衛軍)이 혁파된 뒤에는 금군(禁軍) 중에서 녹봉이 후한 자로 하여금 교대로 입직하게 하였다. 『대전통편』 권4, 병전 봉수 항목에 따르면 목멱과 무악 두 산의 봉군 30호(戶)에는 호마다 각각 보(保) 3명씩을 지급하였으며, 총 120명을 24번으로 나누어 5명이 6일씩 담당 봉수에 교대로 입번케 하였다.
지방에서는 각도 관찰사 휘하의 수령이 진장(鎭將)을 겸직하여 봉수의 오장과 봉수군을 지휘 및 감독하였다. 연변봉수의 경우, 1437년(세종 19) 의정부의 장계에 따라 각도의 극변초면(極邊初面) 가운데 봉수가 있는 곳에서는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근처에 사는 백성 10여 명을 모아 봉졸로 삼게 하였다. 또한 3명씩 번을 서되, 모두 병기를 지니고 봉수 위에서 주야로 정찰한 뒤 5일 만에 교대하도록 하는 등 봉화의 신설과 봉졸의 선정 및 근무 조건을 정하였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뒤에는 봉수마다 봉수군 10명, 오장 2명 등 총 60명을 배치하여 상하 2번으로 근무하였다.
내지봉수(內地烽燧)의 경우에는 연변봉수보다 소속된 인원이 적었다. 1446년에 봉수마다 감고(監考) 2명, 봉화군 6명을 배정하고, 2번으로 나누어 밤낮으로 상주하면서 망을 보게 하였다. 각 지역 봉수에 속한 인원의 구성을 읍지를 통해 살펴보면, 먼저 봉수마다 책임자에 해당하는 별장이 1~2명 있었다. 그 아래에 감고 혹은 감관, 또는 오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봉군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 아래에 군인 혹은 봉보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군역(軍役)의 배정은 고을의 형편에 따라 달랐다.
이들 전체가 5명을 기준으로 조를 이루어 근무하였다. 예컨대 풍기 망전산봉수(望前山烽燧)는 오장 1명과 군인 4명을 합하여 5명씩 번을 이루므로 20번이었는데, 문경 탄항봉수는 봉군 1명에 보인 3명이 번을 이루므로 4명씩 25개의 번을 이루었다.
한편 조선후기 전라도 지역 봉수의 경우 번을 서는 근무자의 구성이 매우 모호하였으며, 인원수 또한 상이한 경우가 많았다. 또 봉수군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이 매우 미약하여, 봉수군 1명당 3~4명의 보가 딸린 다른 지역과 달리 보가 2명씩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서읍지(湖西邑誌)』
- 『옥천읍지(沃川邑誌)』
- 『영남읍지(嶺南邑誌)』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호남읍지(湖南邑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 김주홍, 「朝鮮時代의 內地烽燧」,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