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설치(復讐雪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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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명(明)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에서 당한 수치를 씻자는 의미로, 조선후기에 유행한 정치 구호.

개설

병자호란 때 왕이 성을 나와 직접 항복한 일[南漢出城]은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조선과 군부(君父)와 신자(臣子) 관계로 이념화되어 있던 명을 저버리고 그 원수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은 어떤 논리로도 변명이 불가능한 최악의 불충이자 불효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조선왕조의 지배 엘리트들 스스로 왕조의 지배 이념과 유교적 가치를 심각하게 범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런 이념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에서는 절치부심과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이때 등장한 관용어가 바로 복수설치(復讐雪恥)였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등장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사조로는 17세기 후반의 북벌 논의와 18세기의 춘추의리 또는 존주의리(尊周義理) 담론을 들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복수설치는 한마디로 군부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치욕을 씻자는 취지의 관용어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조정과 재야에서 널리 회자된 용어이자 정치구호였다. 삼전도의 항복이 조선의 지배층에게 엄청난 충격이 된 이유는 단지 이전에 천시하던 오랑캐를 군주로 섬기게 된 전도된 현실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이유는 그동안 군부로 섬겨 오던 명을 저버리고 그 원수인 청에게 항복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자괴감이었다. 특히 명과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군부와 신자 관계로 이념화되어 있었기에, 삼전도의 항복은 곧 신하가 군주를 배신하고 자식이 부모를 저버린 극악한 패륜으로 풀이되었다. 남한산성의 절박한 상황에서 차라리 나라가 망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다 죽어야 후세에 할 말이 있다고 한 척화(斥和) 논리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변천

1644년(인조 22)에 청이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고 중원을 정복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통제가 조금 약해진 효종대(1649~1659년)에는 복수설치의 일환으로 북벌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청이 아직 강남까지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이때의 복수설치는 내수(內修)보다는 외양(外攘)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북벌 논의로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보면, 17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복수설치라는 표현은 대개 북벌 논의와 관련해 쓰였다.

그러나 청이 강남까지 완벽하게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중국을 완전히 평정한 1680년대 이후로 북벌 논의가 자연스럽게 종식되었고, 복수설치 정신은 다른 모습으로 변환되어 나타났다. 현실적으로 외양(外攘) 차원의 복수설치가 불가능함이 분명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수설치 정신 곧 춘추의리 정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복수설치는 외양보다는 내부제도를 정비하는 내수(內修)에 중점을 둔 의례(儀禮)의 형태로 나타났다. 어차피 청을 직접 공격해 복수설치를 실천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안으로 존주의리를 되새김으로써 복수설치의 의리 정신을 잊지 말자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명이 망한 지 60년째인 일주갑(一週甲)이 돌아온 1704년(숙종 30)을 기념해 한양과 충청도 괴산에 각각 건립한 대보단(大報壇)만동묘(萬東廟)였다. 실제로 18세기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에 보이는 복수설치라는 표현은 대개 대보단이나 만동묘와 관련해 등장하였다. 대보단과 만동묘는 모두 조선에 큰 은혜를 베푼 명 황제들을 모신 제단 또는 사우(祠宇)였는데, 18세기와 19세기는 물론이고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17세기 후반의 북벌 담론이나 18세기 내내 강조되고 강화된 존주의리 관련 의례와 제례는 모두 복수설치 정신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하여 정치무대에 등장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보단사연설(大報壇事筵說)』
  • 『존주휘편(尊周彙編)』
  • 『갈암집(葛庵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계승범,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998.
  • 우인수, 「조선 효종대 북벌정책과 산림」, 『역사교육논집』 15, 1990.
  • 이영춘, 「우암 송시열의 존주사상」, 『청계사학』 2, 1985.
  • 이욱, 「조선후기 전쟁의 기억과 대보단 제향」, 『종교연구』 42, 2006.
  • 임부연, 「유교 의례화의 정치학: 만동묘와 대보단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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