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문(普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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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동궁 영역 북쪽 담장에 있던 문.

개설

조선왕조 500여 년의 기간 동안 왕실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자주 임어하여 거했던 창덕궁과 창경궁은 완벽하게 분리된 2개의 궁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두 궁궐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조선왕조의 법궁 즉 경복궁이 소실되어 사라진 17~19세기에는 동궐이 하나의 영역으로 묶여 법궁의 규모를 갖추고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거의 창덕궁과 창경궁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고, 각 궁궐의 영역을 관념상 명확히 나누기가 어려운 면도 있다. 보화문(普化門)은 창경궁 영역 에 있어 세자가 창경궁을 드나들 때 이용하였다.

위치 및 용도

세자의 거소인 동궁의 영역은 동궐의 남쪽에, 즉 창덕궁과 창경궁에 걸쳐 쭉 펼치듯 놓였는데, 동궁 영역의 가장 동쪽에 진수당이 놓였고 진수당의 널찍한 뒷마당 북쪽에 보화문이 있다. 보화문이 있는 담장을 경계로 숭문당과 문정전의 영역이 나뉘어졌다. 보화문은 물리적인 영역으로서의 창경궁 영역 안에 들어 있으면서 남쪽에는 진수당의 뒷마당이, 북쪽으로는 숭문당과 함인정이, 서쪽으로는 취운정이 놓였고, 동쪽은 문정전의 담장과 연결되었다. 동궁 영역을 두르는 담장의 가장 북쪽 문이기 때문에 세자가 창경궁으로 들어가 치르는 의례의 동선에서 경유하는 문으로 자주 거론되었고, 창경궁에 거소를 마련한 대비를 알현할 때에도 이 문이 사용되었다(『영조실록』 19년 3월 17일).

변천 및 현황

보화문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기록상 영조 때에는 ‘보화문(普化門)’으로 표기되던 것이 정조 때부터는 ‘보화문(普和門)’으로 표기되고 있다. 1900년대 초까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훼손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진수당 뒷마당을 두르는 담장의 북쪽에 있으며, 담장보다 높은 1칸짜리 솟을문의 형태였다. 맞배지붕을 이고 있으며, 4개의 기둥이 구조를 갖춘 사주문(四柱門)으로 조성되었고,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고 있는 조촐한 문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4년(영조 40)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장례가 치러지던 9월 26일이었다. 다음 날에 발인을 해야 했는데, 예조가 망애(望哀) 의식에 관한 의주(儀註)를 동궁에게 직접 아뢰지 않았고, 그에 대한 대답도 세자시강원에서 처리하였다. 영빈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영조는 이날의 일을 처리한 관원들을 파직하였다.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이날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보화문 밖으로 나가 망애례(望哀禮)를 거행하였다(『영조실록』 40년 9월 26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