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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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북도 군위군 청화산에 있는 절.

개설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에 일연이 총림(叢林)을 설치하였고,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인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六文)이 주지로 부임하여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였고, 최근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신라 소지왕 때 심지(心知) 또는 은점(恩霑)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나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이어서 신빙성이 없다. 801년(신라 애장왕 1)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주석했고 일연(一然)이 총림(叢林)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고려후기 법주사의 사세(寺勢)를 짐작하게 해준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군위(軍威) 법주사(法住寺)가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군위 법주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이었다.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법주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23년(인조 1) 화재로 소실되었고, 1660년(현종 1)에 재건하였다. 1690년(숙종 17) 보광명전을 중건했다.

(3) 현대

1977년 보광명전의 용마루를 중수할 때 『화엄경』, 『법화경』, 『전등록』 등 귀중한 불교 경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본당 서편에 손상된 불상인 파불(破佛) 15좌를 매몰하고 5불상은 대법당 앞에 매몰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나 재난을 당하기 전 이 절의 규모가 매우 웅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이 주지로 부임한 후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여 그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2001년 보광명전을 새로 건립하고, 2003년 명부전과 산신각을 세웠다. 최근에 설선당,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문화재

법주사 왕맷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2호)은 국내에서 발견된 맷돌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절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암돌, 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에 구멍이 4군데나 뚫려 있는 원형의 석조물이다. 약 300년 전인 조선후기 때 만들어진 맷돌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법주사의 사세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법주사 5층석탑(法住寺 五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은 높이 3.56m의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쌓은 탑이다. 현재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석탑이라고 전해온다.

참고문헌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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