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채(白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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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음식 재료로 사용하던 것으로, 십자화과에 속하는 초본식물.

개설

잎과 줄기를 먹는 엽경채류로 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져서 자란다. 잎은 가운데가 흰색으로 두껍고, 겉은 녹색으로 엷고 주름져 있다. 김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로, 조선에서는 제물로도 이용하였다. 숭채(菘菜)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중국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으로 여겨지나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한정록(閑情錄)』「치농(治農)」편에 배추[白菜]를 포함한 가을철 채소를 재배하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7~8월경에 하종(下種)했다가 9월에 둑을 짓고 나누어 심은 다음 자주 거름물[糞水]을 준다. 서풍이 부는 날이나 고초일(枯焦日)에는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가장 많이 소비되는 채소 중 하나로 특히 김치의 주재료이다. 상고시대로부터 조선전기까지는 순무, 가지, 외, 동아 등이 김치의 주재료였다. 중국에서는 11세기경에 반결구배추가 재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집(梅月堂集)』에서 살찐 배추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세기에 반결구형의 배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추는 모양에 따라 결구가 되지 않는 불결구품종, 반결구종, 결구종으로 나뉜다. 재래종의 배추는 잎이 둥글게 말리고 속이 꽉 들어차는 결구배추가 아니었으나, 조선후기 이후 중국에서 들여온 배추 종자로 육종을 거듭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결구종이 되었다.

중종대에 중국과의 사무역을 하던 노비는 사기와 잡물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기장, 쌀, 좁쌀, 붉은콩, 껍질 벗기지 않은 조, 배추씨[白菜種] 등을 바꾸었다고 자수하였다(『중종실록』 28년 2월 6일). 선조대에는 호송군이 요동에 이르러 돌아올 때 여러 채소 종자를 가지고 왔다(『선조실록』 26년 12월 8일).

『북학의(北學議)』에 의하면 서울 사람은 해마다 연경에서 배추씨를 받아오는데 맛이 매우 좋다고 했으며, 이것도 3년 동안 씨앗을 바꾸지 않으면 복(蔔)으로 변해 버린다고 하였다. 이렇듯 1800년대 초까지 독자적인 반결구배추를 갖추지 못하고 중국에서 종자를 수입하여 재배하였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는 다음과 같은 7언 절구가 있어 배추 육종에 대한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마당을 절반 떼어 배추를 심었는데 / 菘葉新畦割半庭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 났네 / 苦遭蟲蝕穴星星

어찌하면 훈련대 앞 가꾸는 법 배워다가 / 那將訓鍊臺前法

파초 같은 배추잎을 볼 수가 있을까 / 恰見芭蕉一樣靑

조선말기에 궁궐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工人)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남성(南城) 박지사(朴知事)가 편지를 보냈는데, 배추 4바리를 사서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배추 45단[把]을 샀는데, 값이 45냥이었다. 삯꾼에게 지어서 올려 보냈는데, 품삯은 매 짐에 7냥으로 정해 보냈다고 하였다.

연원 및 용도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채를 배추라 하여 한양 성문 밖에 많이 심어 이익을 본다고 하였다. 『다산시문집』에서 정약용(丁若鏞)은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의 발문에서 숭채는 방언으로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白菜)의 와전이다. 중국에서는 한 가지만 배워도 충분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방언이 많아 이를 모두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배추는 제물로 올려졌다. 혼전(魂殿)의 조석상식(朝夕上食), 산릉(山陵)의 제사에 올랐고,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예장(禮葬)에서 발인 전후의 각양 진배 물품 중에 백채를 108근 정도 봉진하였다.

배추는 국, 찜, 선, 쌈, 김치 등의 주·부재료로 식생활에서 가장 필수적인 재료이다. 배추선은 『주식방문(酒食方文)』에 의하면, 좋은 배추를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 솥을 달구고 기름을 조금 둘러 잠깐 볶아 낸다. 겨자를 조금 짭짤하게 하여 쳐서 쓰면 좋다고 하였다.

『시의전서(是議全書)』와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에는 좋은 배추의 속대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살짝 데쳐 낸다. 돼지고기는 가늘게 썰고 표고, 느타리, 석이, 실고추, 파, 미나리는 채쳐 갖은 양념을 한다. 배추와 합하여 주물러 다시 살짝 볶아 내서 겨자를 곁들여 먹는다고 하여 두 책의 조리법에 차이가 있다.

『음식책(飮食冊)』에서 배추선 하는 법은 침채였다. 만드는 법은 가을 김장 때 미리 무를 사서 넙적넙적 굵게 썰어 그대로 말리거나 절여서 보자기에 싸서 맷돌이나 무거운 것으로 눌렀다가 말린다. 외와 가지와 풋고추·고춧잎 절인 것을 미리 내어 물에 우린다. 외와 가지·고추는 눌렀다가 납작한 것은 말리고 고춧잎은 맹물에 절였다가 말린다. 배추는 맨 속대만 빼 통으로 절이되 짜지 않게 절였다가 비틀어 짜서 물기 없이 한다. 실고추는 곱게 썰고 파와 생강, 마늘, 갖은 양념을 곱게 채친다. 깨소금 2~3되를 양에 맞추어 볶되 많아야 좋으니 다른 양념보다 많이 볶아 양념과 함께 버무려 배추 속에 통째로 넣는다. 무, 가지, 외, 고춧잎은 양념에 고기를 재듯 주무르는데 배추 잎으로 속이 빠지지 않게 잘 동여매어 같이 주무른다. 『시의전서』에는 처음으로 배추통김치가 기록되어 있다. 좋은 배추통을 맞춰 절이고 실고추, 총백(파), 마늘, 생강, 생밤, 배는 다 채 친다. 조기젓·청각·미나리·소라·낙지는 속에 섞어 넣어 간을 맞추고, 무와 오이지는 가로 세로로 켜켜이 넣었다가 3일 만에 조기젓국을 달여 물에 타서 국을 부으면 좋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무, 배추 등의 생산과 공급이 안정적으로 되면서 겨울철을 대비한 김장문화가 정착되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10월의 농사일이 끝나면 무·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한다고 하였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서울 풍속에 무·배추·마늘·고추·소금 등으로 독에 김장을 담근다. 여름의 장 담그기와 겨울의 김장 담그기는 인가(人家)의 일 년의 중요한 계획이었다.

그 밖에도 배추는 섞박지·속대장아찌·어육김치·장짠지·장김치·젓무·굴김치 등의 침채류에 사용되었으며, 궁중 잔치[進宴]에 올려진 저육장방탕(猪肉醬方湯), 『주식방문』의 칠양계·돼지순대 등의 부재료로 이용되었다. 『음식책』에는 가을철 교자상에 찜은 순무나 배추속대로 하라고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시의전서』에도 각종 채소류에 배추가 기록되어 1800년대 말에는 널리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여러 채소 보관하는 법이 나오는데, 배추는 서리 내린 뒤에 배추꼬리를 움에 넣고 마른 말똥으로 싸 두면 잎이 나 극히 연하고 줄기에 손실이 없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규합총서(閨閤叢書)』
  •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매월당집(梅月堂集)』
  • 『북학의(北學議)』
  • 『시의전서(是議全書)』
  •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 『음식책(飮食冊)』
  • 『주식방문(酒食方文)』
  •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
  • 『진연의궤(進宴儀軌)』
  • 『한정록(閑情錄)』
  • 『해동잡록(海東雜錄)』
  •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 차경희, 「조선 중기 외래식품의 도입과 그 영향-서류·두류·채소류를 중심으로-」,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20권 4호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