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징세(白地徵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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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정의 대표적 폐해 가운데 하나로, 경작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 조세를 거두는 것.

개설

농업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경작지를 파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노력은 효력을 잃어갔다. 토지를 파악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과정에서 실제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지방관아에서 그와 같은 폐해가 심각하게 나타났다. 또 백지징세는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세금징수 과정에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백지징세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조세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국가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量田)이 자주 실시되지 못하면서, 정전(正田)이나 속전(續田)·진전(陳田)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여 전품(田品)의 파악이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경작지는 시간이 흐르면 본래 자연재해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그 지형이 바뀌기 마련이었다. 이때 바뀐 지형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과세를 실시하지 못하고 이전처럼 세금을 거두면 결과적으로 백지징세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바로 백성들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이런 양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풀과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룬 곳과 모래땅이 되어 버린 곳에도 백지징세를 하여 백성들을 침탈하였다(『정조실록』 2년 7월 20일). 땅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조세 수취 대상이 되는 토지가 장부[量案]에 남아 있는 것을 허결(虛結) 또는 부결(浮結)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토지대장인 양안(量案) 등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허결에 부과되는 조세를 백지징세라 한다.

변천

백지징세는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궁핍한 농민이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없으면 통수(統首)나 이웃[社隣]에게 대신 부과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하는 현상을 촉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순조실록』 14년 2월 26일).

백지징세는 농업의 생산 자체를 가로막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농사를 짓지 않음으로써 경작지가 황무지[陳田]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도 이를 모르지 않아서, 세금을 줄여 주어서 경작 면적의 축소를 막자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백지징세는 지방 아전이나 궁방 등에 의해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자연재해를 입어 전세를 면제받아야 하는 토지인데도 이서(吏胥)들의 농간으로 진재결(陳災結)에 편입되지 못하고 실결(實結)에 편입되어 백지징세를 강요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궁방전(宮房田)이나 관둔전(官屯田)에서 전세를 수취할 때에 백지징세의 폐단은 더욱 심각하게 발생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흉년이 심해 경작되지 않은 채 버려진 진전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토지의 실결수(實結數)는 원래 장부의 결수보다 훨씬 적었으며, 그 위에 이서의 농간과 백지징세의 폐해 역시 심화되었다. 진전이 많이 발생하여 전세가 줄어들자 진전의 일부에 대해서는 백지징세가 부과되었고 때로는 족징(族徵)·이징(里徵)이 수반되기도 하여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목민심서(牧民心書)』
  • 김용섭, 「純祖朝의 量田計劃과 田政釐正問題」, 『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 김용섭, 「哲宗朝의 應旨三政疏와 三政釐正策」, 『增補版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 일조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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