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간지란(芳幹之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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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방간지란 |
한글표제 | 방간지란 |
한자표제 | 芳幹之亂 |
동의어 | 경진지란(庚辰之亂), 회안경진지변(懷安庚辰之變), 회안구난지사(懷安搆亂之事), 회안군경진지사(懷安君庚辰之事), 회안지구역(懷安之構逆), 회안지란(懷安之亂), 회안지역(懷安之逆) |
관련어 | 무적사(無嫡嗣), 발병응변(發兵應變)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변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춘순 |
발생시기 | 1400년(정종 2) 1월 |
관련 인물/집단 | 강승평(姜昇平), 강인부(姜仁富), 곽범(郭凡), 곽승우(郭承祐), 곽원(郭願), 곽충보(郭忠輔), 김간(金旰), 김국진(金國珍), 김귀남(金貴南), 김보해(金寶海), 김월하(金月下), 민공생(閔公生), 민교(閔校), 민도생(閔道生), 민원공(閔原功), 박만(朴蔓), 박인길(朴寅吉), 박포(朴苞), 설숭(薛崇), 오용권(吳用權),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원윤(元胤),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 이거현(李巨賢), 이군필(李君弼), 이란(李蘭),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이백온(李伯溫), 이옥(李沃), 이윤량(李允良), 이침(李忱), 임천년(任天年), 장담(張湛), 정륜(鄭倫), 정승길(鄭承吉), 최룡소(崔龍蘇), 환유(桓愉), 황재(黃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방간지란(芳幹之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년 3월 9일, 『정종실록』 2년 2월 1일, 『정종실록』 2년 1월 28일, 『세종실록』 3년 3월 9일 |
1400년(정종 2) 1월에 회안군이방간이 동생 이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난.
개설
태조의 4남 회안군(懷安君)이방간(李芳幹)은 이방원(李芳遠)이 일으킨 무인정사(戊寅定社), 즉 제1차 왕자의 난에 함께하였다. 그 공으로 이방원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에 추록되고, 정사(定社) 1등 공신으로 책훈(策勳)되었다. 즉위한 정종에게 후사가 없자, 이방간은 서열상 태조의 4남인 자신이 정종의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방원에 대해 꺼리는 마음이 있었던 이방간은, 정사의 공에 참여하였지만 이방원의 대우에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의 "선수를 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정종의 항복 권유도 무시한 채 이방원의 군사에 대항하였다가 패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인 홍주(洪州: 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병들어 죽었다(『세종실록』 3년 3월 9일). 박포는 청해(靑海: 현 함경남도 신포시·북청군·덕성군 일대)로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역사적 배경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방원의 의도에 밀려 즉위한 정종에게는 적사(嫡嗣)가 없었다. 정종이 즉위한 후 이방원은 공신이자 우군절제사 겸 판상서사사로서 국정 운영을 좌우하였다. 이방간도 공신이자 좌군절제사로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형제 중에서 정종의 후사가 선정된다면 서열로 보아 마땅히 자신이 그 적임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심이 개국·정사의 공을 주도한 이방원을 따르자 이방간은 이를 깊이 꺼렸다.
발단
1399년에 박포가 이방간에게 큰 비를 보고 "겨울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 말을 이방원이 이방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연결시켰다. 왕위 계승 문제로 이방원을 좋지 않게 여기던 이방간에게 접근하여 선수를 쳐야 한다고 충동한 것이었다.
박포는 본래 정안공(靖安公)이방원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정사의 공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자신을 외방으로 폄척(貶斥)한 것 때문에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불만을 가진 이방간을 충동하여 그가 큰 공을 세우면 함께 오래도록 부귀 누리기를 원했다(『정종실록』 2년 2월 1일). 선수를 치지 않으면 당할 것이라는 말로 박포가 분노와 불안감을 자극하자, 이방간은 이방원에 대한 불만과 거사 계획을 처조카인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이래(李來)에게 말하였다. 이래는 스승인 우현보(禹玄寶)에게 이방간의 계획을 알렸고, 우현보의 문생인 이방원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경과
이방원은 하륜(河崙)·이무(李茂) 등과 계책을 의논하고, 이방간이 사냥하는 곳을 수색하여 그의 군사가 집결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방간은 이방원의 화해 요청도 거절하고 군사를 해산하라는 정종의 교지도 무시한 채, 이방원이 자신을 해치려 하므로 군사를 일으켜 그에 알맞게 처리하겠다고 당시 태상왕(太上王)이었던 태조에게 알린 후 군사를 움직였다. 이에 처음 동복형제 간의 충돌을 자제하였던 이방원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양측이 교전한 끝에 이방간의 군사가 패하여 흩어졌고, 이방간은 도주하였다가 항복하였다. 박포는 청해에 유배되었고, 이방간 부자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정종의 보호로 토산(兎山)에 안치되었다(『정종실록』 2년 1월 28일). 그 외 관련자들은 참형·유배·중도부처(中途付處)에 처해졌다[『정종실록』 2년 2월 1일]. 난이 진압된 후 이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방간의 유배지는 토산 → 익주 → 순천부 → 익주 → 완산 → 홍주 순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방간은 1421년(세종 11) 마지막 적소인 홍주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세종실록』 3년 3월 9일). 이방간이 사망한 후 그 아들 이맹종(李孟宗)은 1423년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죄목으로 명을 받고 자진(自盡)하였다. 이 난으로 정안공이방원은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졌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1: 태종세가』, 역사문화, 2008.
- 류주희, 「태종의 집권 과정과 정치 세력의 추이」, 『중앙사론』20, 2004.
- 윤두수, 「조선 정종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대학원 논문집』15, 1990.
- 이희관, 「조선 초 태종의 집권과 그 정권의 성격」, 『역사학보』120, 1988.
- 전철기, 「여말 선초의 사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