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장(朴弘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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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8년(명종 13)~1598년(선조 31) = 4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무관. 장악원(掌樂院)정(正)과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냈다.자는 사임(士任)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거주지는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박세렴(朴世廉)이며, 어머니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남시준(南時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박영기(朴榮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시(司僕寺) 정에 추증된 박지몽(朴之蒙)이다. 형은 병사(兵使)박의장(朴毅長)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한 뒤 아이만호(阿耳萬戶)가 되었고, 그 뒤 선전관(宣傳官)과 제주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1596년(선조 29) 6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거쳐 장악원 정으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9년 6월 25일, 선조 29년 6월 26일] 그리고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인 통신정사(通信正使)황신(黃愼)과 함께 강화의 중책을 띠고 그해 8월 일본으로 갔다.[『선조실록』선조 29년 6월 25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29년 6월 1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사절을 멸시하여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나라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10일, 『동각잡기(東閣雜記)』 권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그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22일]

이어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임명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전임되었다가 1598년(선조 31)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나이가 46세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30일] 그의 형인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해동역사(海東繹史)』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무안박씨대동보(務安朴氏大同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