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장(朴弘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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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홍장 |
한글표제 | 박홍장 |
한자표제 | 朴弘長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사임(士任)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8년(명종 13) |
사망 | 1598년(선조 31) |
본관 | 무안(務安) |
주거지 | 영해(寧海) |
증조부 | 박지몽(朴之蒙) |
조부 | 박영기(朴榮基) |
부 | 박세렴(朴世廉) |
모_외조 | 영양 남씨(英陽南氏):남시준(南時俊)의 딸 |
형제 | (형)박의장(朴毅長)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홍장(朴弘長) |
총론
[1558년(명종 13)~1598년(선조 31) = 4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무관. 장악원(掌樂院)정(正)과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냈다.자는 사임(士任)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거주지는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박세렴(朴世廉)이며, 어머니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남시준(南時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박영기(朴榮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시(司僕寺) 정에 추증된 박지몽(朴之蒙)이다. 형은 병사(兵使)박의장(朴毅長)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한 뒤 아이만호(阿耳萬戶)가 되었고, 그 뒤 선전관(宣傳官)과 제주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1596년(선조 29) 6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거쳐 장악원 정으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9년 6월 25일, 선조 29년 6월 26일] 그리고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인 통신정사(通信正使)황신(黃愼)과 함께 강화의 중책을 띠고 그해 8월 일본으로 갔다.[『선조실록』선조 29년 6월 25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29년 6월 1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사절을 멸시하여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나라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10일, 『동각잡기(東閣雜記)』 권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그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22일]
이어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임명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전임되었다가 1598년(선조 31)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나이가 46세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30일] 그의 형인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해동역사(海東繹史)』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무안박씨대동보(務安朴氏大同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