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안인(閔安仁)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민안인 |
한글표제 | 민안인 |
한자표제 | 閔安仁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공민왕~태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자복(子復)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43년(충혜왕4) |
사망 | 1398년(태조7) |
본관 | 여흥(驪興) |
묘소소재지 | 충청도 덕수현(德水縣) 옥금산(玉金山)의 선영 |
증조부 | 민지(閔漬) |
조부 | 민상정(閔詳正) |
부 | 민선(閔璿) |
모_외조 | 전주최씨(全州崔氏): 최문도(崔文度)의 딸 |
형제 | (동생)민유의(閔由誼), 민공생(閔公生) |
처_장인 | 이씨(李氏): 이도손(李道孫)의 딸 →(자녀)2남 1녀 |
자녀 | (1자)민진(閔進) (2자)민소(閔逍) (1녀)최관(崔關)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안인(閔安仁) |
총론
[1343년(충혜왕4)∼1398년(태조7) = 56세]. 고려 공민왕∼조선태조 때 문신. 자는 자복(子復)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고려 판도(版圖) 판서(判書)민선(閔璿)이며,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는 고려 첨의(僉議) 평리(評理)최문도(崔文度)의 딸이다. 고려 첨의(僉議) 찬성(贊成)민상정(閔祥正)의 손자이고, 조선개국공신(開國功臣)민여익(閔汝翼)의 4촌이다.
고려 말기 활동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훈계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다가, 1365년(공민왕14) 국자감시(國子監試)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여,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양촌(陽村)권근(權近) 등과 교유하였다. 1374년(공민왕23) 32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복제를 끝마치고, 통례문(通禮門) 지후(祗候)에 임명되고,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예의(禮儀) 총랑(摠郞)과 전법(典法) 총랑 등을 역임하였다. 강직한 언행으로 권귀(權貴)들의 비위를 거슬러 파면되어 4년 동안 한가롭게 지냈다. 다시 군부(軍簿) 총랑에 임명되었다가, 삼사(三司)의 우윤(右尹)과 좌윤(左尹) 등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제고(制誥)의 관직을 겸임하였다. 14년 동안이나 문서 응봉사(文書應奉司)를 맡았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근실하다고 칭찬하였다.
조선 태조시대 활동
1392년 건국한 조선은 명(明)나라와 국교가 평탄치 못하였다. 명나라 태조주원장(朱元璋)은 조선의 이성계(李成桂)가 왕위를 찬탈하였다며 고명(誥命)을 주지 않고, “임시로 나랏일을 보라.” 뜻의 ‘권지국사(權知國事)’만을 사신으로 온 조림(趙琳)의 편에 허락하였다. 그해 12월에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우인열(禹仁烈)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민안인(閔安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따라 갔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 중국에서 돌아와서 태조를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謁見)하고, 중국에서 받은 각궁(角弓) 2개를 바쳤다. 1400년(정종2)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명나라 태종(太宗)영락제(永樂帝)로부터 고명과 옥새(玉璽)를 받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나라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민안인은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 성균관 좨주(祭酒)로 임명되어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쳤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가 직책에 알맞다고 하였다. 교서감(校書監)으로 전임되었다가, 평양교수(平壤敎授)로 나갔다. 그때 평양의 문묘(文廟)를 수리하여 석전(釋奠)의 의식을 갖추어 가르쳤으므로, 생도들 중에 이에 감화되어 가묘(家廟)를 세우고 여묘살이 하는 자가 많았다. 1395년(태조4)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고 새로운 종묘(宗廟)가 완성되자, 그가 전고(典故)에 밝다고 하여 악기(樂器)를 수리하게 하였다. 그는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들고 결여된 것을 보충하여, 종묘의 악기를 모두 갖추었다. 1398년(태조7) 윤5월 9일 한양의 자택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56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안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솔직하고 성실하며 인정이 많고 검소한데다가, 학문을 즐기고 옛 것을 좋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남에게 청탁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말하고 행동할 때에도 반드시 옛 것을 따르고 구차하게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훈몽(訓蒙)』 몇 편을 주석(註釋)하였다. 또 『속동인문(續東人文)』을 편찬하려고 많은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였는데, 1백여 질(帙)이나 되는 글을 여러 해 동안 손수 초록(抄錄)하였으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덕수현(德水縣)의 옥금산(玉金山)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친구 양촌(陽村)권근(權近)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병부(兵部) 시랑(侍郞)이도손(李道孫)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민진(閔進)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딸은 예조 총랑최관(崔關)에게 시집갔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문선(東文選)』
- 『목은집(牧隱集)』
- 『삼봉집(三峯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목은고(牧隱藁)』
- 『삼봉집(三峯集)』
- 『독곡집(獨谷集)』
- 『운곡행록(耘谷行錄)』
- 『도은집(陶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