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호도감(廟號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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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정해졌던 묘호를 후대에 고치기 위해 세운 임시 관청.

개설

묘호는 왕의 사후 대를 이은 다음 왕이 조종공덕(祖宗功德)의 원리에 의해 결정하여 올리는 일종의 시호(諡號)이다.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졌다. 앞의 한 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諡法)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뒤 글자는 조(祖)나 종(宗)을 붙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를 종보다 중시하게 되어, 종호를 종에서 조로 고쳐 부르기[改上] 위해 묘호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우선 광해군대와 현종대에 묘호도감을 설치하여 선종을 선조로, 인종을 인조로 고쳐 불렀다. 다음으로 숙종대에 제2대 정종의 묘호를 새로 정하기 위해, 고종은 영종을 영조로 개호하기 위해 각각 묘호도감을 설치하였다.

한편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국가의 지위가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고종황제의 7대 조상을 황제로 추존하여 묘호를 올리고 황제로 칭하고자[稱皇] 추존도감을 세웠다. 우선 고종의 고조인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고쳤다. 이후 장종, 정종, 순조, 익종의 묘호를 고쳐서 올렸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자마자 7대조까지 황제로 칭하고자 추봉도감을 설치하였고 진종과 헌종, 철종의 묘호 추봉이 완성되어, 제통(帝統)이 확립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묘호는 왕이 승하한 직후 왕위를 계승한 왕과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대신들이 삼망(三望)을 올리면 죽은 왕의 대를 이은 왕[繼後王]이 낙점하는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묘호를 결정할 때 종호(宗號)는 왕권의 정통성이나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공덕을 높이기 위해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임진왜란 이후 조종(祖宗)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종보다 조를 중시하여, 종호를 종에서 조로 고쳐 부르는 개상(改上)을 위해 묘호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종호의 개상은 선조가 처음이었다. 광해군은 1698년(광해군 2) 선종을 종묘에 부묘할 때 선왕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로가 ‘개창조업(開倉肇業)’에 버금하는 일이므로 묘호를 ‘종’이 아닌 ‘조’로 추상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광해군은 선조의 두 가지 공로를 들어 묘호도감을 설치하였다. 첫 번째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의 공로였다. 중국 법전인 『대명회전』에는 고려 때 권신(權臣)인 이인임이 이성계의 아버지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을 선조 때인 1584년(선조 17)에 발견하여 그 기록을 수정하였다. 둘째,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가 있었으나 명나라와 큰 외교적 마찰 없이 사건을 잘 무마한 공로였다. 임진왜란 도중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중국을 쳐들어갈 것이라고 명나라에 무고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것을 잘 해명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를 통해 선왕에 대한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추상하면서 광해군 자신의 정통성도 확립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1681년(숙종 7)에 설치한 묘호도감은 조선 제2대 왕이면서 300여 년간 ‘공정대왕’으로 불리며 묘호가 없던 국가의 궐전(闕典)을 해소하고자 설치하였다. 이처럼 조선 제2대 공정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추상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종통(宗統)을 확립할 수 있었다.

1858년(철종 9) 순종의 묘호를 순조로 개상하고자 묘호도감을 설치·운영하였다. 당시 묘호 개상의 목적은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를 더 이어가려는 의도의 발로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고종이 영종을 영조로 개상하기 위해 묘호도감을 설치·운영하였다. 이것은 영조를 계승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국가의 지위가 격상됨에 따라 황통을 세우기 위해 추존도감을 설치·운영하였다. 1899년에는 고종의 선대 4대조를 황제로 칭하였다. 아울러 1908년(순종 1)에는 고종의 7대조까지 황제로 칭하여 황통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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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및 역할

묘호도감의 조직에서 도제조 1명은 우의정이 맡았다. 그 외 제조는 7~10명, 도청과 낭청은 10명, 감조관은 6명, 별공작은 1명으로 구성되었다. 도제조는 도감의 전체 업무를 총괄하고, 제조는 각 부서의 업무를 책임졌다. 도감을 실제 관리하는 관리는 도청, 낭청, 감조관, 별공작, 감역관이었다. 그 밖에 계사, 서사, 서리, 서원, 고직, 사령, 군사 등이 있었다.

묘호도감에는 도감의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도청이 있고, 하부 제작처로는 1방, 2방, 3방, 별공작, 개제주소, 표석소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각 방에서는 묘호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책보(冊寶)나 연여(輦轝) 등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각색 장인들을 동원하였다. 1방은 옥책과 부속 도구, 요여(腰輿) 등을 담당하였으며, 2방은 금보와 부속 도구, 채여(彩轝) 등을 담당하였다. 3방은 의장 31건을 제작하였다. 개제주소는 영조의 개제주식을 담당하였으며, 표석소에서는 표석을 고쳐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 하늘의 이름으로 역사를 심판하다』, 문학동네, 2010.
  • 김호, 「조선 왕실의 ‘묘호’ 개정을 통해 본 기억의 역사」, 『인간연구』8, 2005.
  •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칭호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경계』52, 2004.
  • 임민혁, 「고·순종의 호칭에 관한 이론과 왕권의 정통성: 묘호·존호·시호를 중심으로」, 『사학연구』78, 2005.
  • 임민혁, 「조선시대 종법제 하의 조·종과 묘호 논의」, 『동서사학』8, 2001.
  • 임민혁, 「조선시대의 묘호와 사대의식」, 『조선시대사학보』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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