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도감(墓所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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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을 조성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조선시대에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세상을 떠나면 상례를 치르기 위해 임시로 예장도감·빈궁혼궁도감과 함께 묘소도감을 설치하였다. 묘소도감은 무덤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건물이나 석물 등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조선전기에는 문종 비 현덕빈과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의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임시로 묘소도감을 설치하였다. 이후 조선후기에 들어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경종의 세자빈이던 단의빈,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와 그의 빈인 효순현빈, 영조의 차남인 사도세자와 의소세손,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 등의 무덤을 조성하고자 묘소도감을 설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묘소도감에서 ‘묘소’는 조선시대 왕세자 또는 세자빈의 묘를 말한다. 묘소도감은 세자나 세자빈의 사후에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설치·운영되었다. 조선전기에는 1441년(세종 23) 문종의 세자빈이던 현덕빈(顯德嬪)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산고로 사망한 후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묘소도감을 설치·운영하였다. 이후 1457년(세조 3)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德宗)이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묘소도감을 설치하였다. 1563년(명종 18)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묘소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묘소도감이 설치된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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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나 세자빈의 묘소(墓所)는 왕이나 왕비의 왕릉, 왕의 친부모의 원소(園所)에 비해 격이 낮다. 하지만 세자나 세자빈의 경우 대부분 나중에 왕과 왕후로 추숭(追崇)되면서 묘소 역시 능원(陵園)으로 격상되었다. 문종 빈 현덕빈은 문종의 즉위 후 현덕왕후로 추존되어 묘소는 현릉(顯陵)으로, 의경세자는 성종의 즉위 후 덕종으로 추존되어 묘소는 경릉(景陵)으로 격상되었다.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정조의 즉위 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어 묘소도 영릉(永陵)으로 격상되었다. 사도세자의 수은묘(垂恩墓)는 정조의 즉위 후 장헌세자로 추증되면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다시 원소를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되었다. 고종황제의 즉위 후 사도세자는 다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의경세자의 연경묘(延慶墓)는 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되어 수릉(綏陵)으로 격상되었으며, 고종황제 즉위 후 문조익황제로 추숭되었다. 따라서 세자의 묘소를 조성하는 묘소도감도 산릉도감·원소도감과 마찬가지로 설치·운영되었다.

조직 및 역할

묘소도감의 총책임자는 도제조(都提調)이며, 좌의정(左議政)이 주로 맡아서 예장도감과 빈궁혼궁도감을 함께 총괄하였다. 산릉도감의 총책임자를 총호사(總護使)라 부르는 것과 비교된다. 묘소도감의 책임자는 제조(提調)이며 규모에 따라 3~5명을 두었다. 의례 절차를 책임질 예조 판서, 예산을 집행할 호조 판서, 인력을 동원할 공조 판서나 호조 판서가 주로 맡았다.

도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관원은 도청(都廳) 1~2명과 각 제작처를 책임질 각소(各所) 낭청(郎廳) 6~11명, 각소의 감조관(監造官) 1~2명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별공작(別工作)은 선공감 봉사(奉事), 분장흥고(分長興庫)는 장흥고의 직장(直長), 번와서는 와서의 별제(別提) 등이 맡아서 운영하였다. 묘소도감에서는 장지를 선정하는 상지관과 많은 사람의 질환을 고쳐 줄 의원이 배치된 것도 특징이다. 도감의 실질적인 업무는 서사(書寫), 서리, 서원, 고직(庫直), 사령, 수직군사 등이 맡아 처리하였다.

묘소도감의 세부 조직은 산릉도감이나 원소도감과 거의 비슷하다.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도청이 있고, 하부 조직은 삼물소·조성소·대부석소·소부석소·수석소·보토소·노야소·별공작·분장흥고·번와소 등으로 세분되었다.

삼물소는 현궁(玄宮)을 조성할 때 석회·가는 모래[細沙]·황토를 버무려 벽에 발라 광중(壙中)을 튼튼하게 만드는 부서로서 사토장(莎土匠)과 목수가 동원되었다. 조성소는 정자각·수복방·전사청·재실 등 각종 건물을 조성하였으며, 장인으로는 목수·니장·개장·조각장·목혜장·화원·화승이 동원되었다. 대부석소는 혼유석·장명등·망주석·문무석·양호마석 등 크기가 큰 석물을 조성하며, 석수·각수·야장 등을 징발하였다. 소부석소는 건물 바닥이나 난간 등에 쓰일 크고 작은 석물을 떠내어 조성하였고, 석수·야장을 동원하였다. 수석소는 썰매나 동차(童車)를 마련하여 크고 작은 석물을 운반하였고, 차장·선장을 동원하였다. 보토소는 승군(僧軍)이나 모군(募軍)을 동원하여 묘소의 봉분을 돋우거나 사초(莎草)를 담당하였다. 노야소는 각종 철물을 제작하였으며, 야장·주장이 징발되었다. 별공작은 장인들이 사용할 도구나 건물 내부에서 사용할 가구 등을 제작하였고, 목수·소목장이 동원되었다. 분장흥고는 건물 내부를 도배하거나 자리[地衣]를 까는 일을 맡았고, 인장·피장·병풍장 등이 동원되었다. 번와소는 건물 지붕에 덮을 기와를 구워서 만들었고[燔造], 와장·적눌장이 동원되었다.

참고문헌

  • 김문식 외 저, 외교통상부 편,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 외교통상부, 2003.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장경희, 「조선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왕릉 정자각과 석의물의 제작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25, 2007.
  • 장경희, 「조선후기 흉례 ‘도감’의 장인 연구」, 『미술사논단』8,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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