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립(募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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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의 역사를 수행하기 위해 품삯을 주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제도.

개설

17세기 이후 부역제도는 개편되고 있었다. 군역과 요역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 징발 체계가 크게 동요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가 요구되었다. 군역과 요역 분야에서 고립제(雇立制)가 성립할 수 있었다. 부역노동이 붕괴하고 있던 시기에, 한편에서는 고립제의 발전 과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립제는 종래의 부역노동 가운데, 신역의 분야에서뿐 아니라 요역의 분야에서도 발생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요역에서의 고립은, 흔히 모립(募立)라고 불리었다.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인부를 모집해서 고립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점에서 신역의 고립제와는 다른 요역의 고립제, 곧 모립제(募立制)의 특징이 있었다. 그때그때마다 고용된 인부는 모군(募軍), 곧 날품팔이로서의 미숙련 잡역부였다. 이들은 특정의 관서에 상시(常時) 고용되지 않았으며, 임노동의 일터를 찾아 떠도는 이 시기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모립제의 성립과 발전은 두 가지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가능하였다. 하나는 부역노동의 쇠퇴에 의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품화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수반되는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에 따라 농민층이 현저하게 분화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배출된 몰락농민·이농민들은 임노동자층으로서 대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 생활수단을 찾는, 새로운 유형의 직업인이었다. 그들에게는 관의 토목공사를 비롯한 각종 역사에서뿐 아니라, 민간의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고용의 기회가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었다. 이들은 중세말기에 형성되는 새로운 임노동자층에 속하였다.

내용 및 특징

모립제는 관에서 인부를 모집하여,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고립하는 제도였다. 모립제는 요역에서의 고립제였다. 이것은 부역노동으로서가 아니라, 고용노동으로서 노동력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모군은 자신의 식량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부역노동에 응해야 했던 징발역군과는 달리 토목공사에 응모하여 소정의 품삯을 받는 이 시기의 임노동자층인 임용위업지류에 속하였다. 모군들은 고가(雇價)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역사에 응모하는 부류였다. 고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들의 응역이 무상의 강제노동인 부역노동과는 구별됨을 뜻하였다.

신역에서의 고립제는 고용기간이 장기적일 뿐만 아니라, 고용주인 관서에의 인신적 예속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점에서 요역에서의 고립제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요역에서의 고립제는 고용기간이 단기적이며, 고용주에 대한 예속 관계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는 부역노동을 구성하던 신역과 요역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요역은 본래 특정 인신을 대상으로 부과되던 것이 아니며, 부정기·부정량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모립제, 곧 요역에서의 고립제는 군병·장인·이예(吏隷) 등을 대상으로 한 신역 일반의 고립제와는 크게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용노동의 새로운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각 분야의 역사에서 급가모립(給價募立), 곧 품삯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일은 점차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 이후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제는 점차 동요하였다. 요역의 물납세화(物納稅化) 추세는 군역에서의 포납화(布納化) 경향, 그 공식적인 군역세로의 개편 과정과 궤를 같이하였다. 17세기 초·중엽에 시행된 결포제(結布制)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한 요역노동의 징발을 대신하였다. 정기적·정량적인 성격을 띠는 공납과 관련된 요역의 종목들은 대체로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새로운 전결세에 흡수될 수 있었다. 군현 단위에서 운영되던 지방적 특성을 띠던 잡다한 지방적 요역의 분야에서는 잡역세가 마련됨으로써, 노동력 징발의 요역을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농민층이 분화되면서 농촌사회에서는 농토의 소유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소작지를 차경(借耕)할 기회도 잡지 못한 몰락농민층이 대두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임노동자로 전환되었다. 이미 부역노동을 징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던 국가권력은 이에 대한 대응의 방식으로 모립제의 고용노동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17세기 이후 전개되는 모립제는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나 잡역 등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지방관아에서 주관하는 각종 역사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경모군(京募軍)이, 후자의 경우는 향모군(鄕募軍)이 주된 고용 대상이었다.

조선후기의 임노동자층은 경영 지주나 경영형 부농과 같은 큰 경영 규모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흔히 고용될 수 있었다. 특히 수전농업에서는 농법의 전환에 따라 이앙의 시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신분제적 예속 관계가 해체되는 가운데 계급적인 모순 관계가 심각하게 개재하고 있었던 노비노동에 비해서 고용노동은 대단히 편리하며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주층이거나 자작농·소작농민·경영형 부농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들의 농업경영에 소요되는 노동력의 많은 부분은 고용노동으로써 충당해야 하였다.

고용노동은 농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기경(起耕)·파종 등 농작업에서뿐 아니라 이엉 엮기, 멍석 맺기, 나무 베기, 역인(役人) 서기, 마철(馬鐵) 박기, 마당 쓸기, 물 긷기, 태전(馱錢) 지기 등 다양한 고용노동으로서 생계를 꾸려 간다고 묘사되었다. 이는 18세기 농촌의 빈농층·임노동자층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대목이었다. 조선후기의 임노동자층은 광업·수공업의 임노동자로 고용되거나, 조창(漕倉) 부근, 경강(京江) 주변에서 물자의 하역노동에 종사한다든지, 도성과 같은 도회 주변에 머물면서 관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토목공사 및 잡역에 고용되는 등 이 시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였던 고용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엽 관부의 각종 토목공사에서나 운송노동을 비롯한 잡역 분야에서 모군이라 불리는 잡역부가 고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고용노동의 한 유형에 속하였다. 이전에는 무상의 강제노동으로써 징발 역군을 사역해 왔던 분야에서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가 적용되었다. 중앙 및 지방관서에서 주관하는 각조 역사의 분야에서 부역노동은 쇠퇴하고 고용노동이 성립·발전하게 된 것이다. 모립제의 고용노동이었다.

변천

모립제 하에서 고용되는 일꾼인 모군은 경모군과 향모군으로 나뉘었다. 경모군은 주로 도성 안팎에 거주하는 임노동자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부는 다른 생업을 가지면서 그 여가 시간에 고용되는 부류도 있었다. 대체로 전업적인 임노동자층이 많았다. 모립제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임노동자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갔다. 도성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도시 빈민층의 생활 수단이 여기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향모군은 역시 두 부류로 나뉘고 있었다. 하나는 농한기의 계절노동에 고용되는 영세농민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촌사회의 임노동자층이었다. 역시 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높아지고 있었고, 이와 함께 농촌사회에서의 모립제도 발전하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에서 모립제가 발전하는 양상은 모군을 모집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모립제 실시 초기에는 때때로 급가책립(給價責立)의 방식, 즉 품삯을 지불하는 것을 전제로 하되, 인부를 강제로 차출하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점차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급가모립(給價募立)의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응모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인부를 고용하는 경제적 계약 관계로 확립되는 과정이었다.

의의

부세제도 변동의 중요한 계기는 국가의 신분제적 인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던 농민층의 성장과 저항에 있었는데, 이제 노동력 징발에 대신하는 물납세 부담의 증액은, 농업생산력 발전에 의한 생산물의 증가분을 흡수해 간다는 점에서 새로운 대립·갈등을 조성하기 마련이었다. 국가 재정의 운영 원리도 크게 달라졌다. 노동력 징발과 현물 징수를 대신하여 노동력과 상품의 구매를 위한 막대한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지출에서 절대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인건비였다. 중앙 및 지방에서 재정 지출의 폭발적 증대가 있게 된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재정 수입의 증대가 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데서 19세기의 위기상이 조성된 것이었다.

17세기 초엽 이후 대두하였던 임노동자층은 그 말엽에는 벌써 상당한 규모로 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농업 생산에서 고용노동을 쓰는 일은 점차 보편화되어서, 노비노동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18·19세기 이후 고용노동의 발달은 일용노동자·단기고공을 크게 늘려갔으며, 농업경영은 빈부를 막론하고 임노동제 위에서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업생산 부문을 비롯하여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고용노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중세사회 체제의 전반적 구조 변동의 산물이었다.

참고문헌

  •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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