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전(萬壽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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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를 위해, 효종이 수정전(壽靜殿)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한 대비전.

개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 14세의 어린 나이로 43세의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인조실록』 16년 12월 4일). 하지만 너무 어리고 병약했던 탓에 인조의 눈 밖에 나, 순탄치 못한 궁궐 생활을 하게 된다. 입궁한 지 7년째 되던 해부터는 왕후의 병증을 빌미로 한 궁궐에서 기거하지 못하였고 인조가 서거했을 때 대면하였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심양에서 돌아온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봉림대군은 장렬왕후의 비참한 생활에 어버이로의 도의와 인간으로의 신의를 보이며 장렬왕후의 힘이 되어 준다. 효종은 인조의 승하와 때를 같이하여 경덕궁에 있는 장렬왕후를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실추되었던 권위를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장렬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효종은 1654년(효종 5) 궁중 잔치를 계획하면서 수정전의 보수를 시작하였고, 얼마 뒤에는 장렬왕후를 위한 만수전을 건립하였다.

위치 및 용도

만수전을 보수하면서 궁궐의 가장 외곽을 두르는 둘레 600여 칸의 새로운 궁장을 완공하였다. 만수전 정전 영역과 별전 영역을 나누어 창경궁 다음가는 규모의 대비전을 완공하였다. 1687년(숙종 13) 9월 2일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다른 전각들이 들어서 만수전 영역을 채우게 되었다(『숙종실록』 13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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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수정당(壽靜堂)을 보수하여 대비전을 마련했지만 불과 1년이 지난 1655년(효종 6), 효종은 새로운 대비전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동궐 안에는 대비의 전각으로 통명전(通明殿)과 수정당이 있었다. 당시는 수정당이 보수되기 전으로, 대비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통명전을 뒤져 저주물을 치워 낸 상태였다. 이후 대비의 건강이 회복되자 이를 축하하는 풍정(豐呈)을 올릴 것을 계획하며, 풍정에 적합한 전각으로 수정당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산을 등진 비좁은 장소에 대비를 모시는 것은 옳지 않다며 새로운 대비전 건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왕이 새로 지을 대비전의 장소로 물색한 곳은 천문과 천기를 관측하던 옛 흠경각 터였다. 이 장소는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궁궐 서편, 선원전(璿源殿)에서 그 후방 일대를 아우르는 영역이었다. 계획된 전각의 규모가 워낙 컸던지라 궁장을 옮기고,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면서 터를 확보해야 할 만큼 거대한 공사였다(『효종실록』6년 12월 2일).

가장 먼저 확정되어야 할 과제는 만수전의 터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궁장을 바깥쪽으로 물려 쌓는 일이었다. 대비전의 정전은 물론 별전까지 짓는, 게다가 누각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공역이었다. 이때 본래의 궁장 영역이 서쪽으로 더 확장되어 옮겨졌고 「동궐도」상에 보이는 곡선의 궁장이 그것이다. 왕은 백성의 부역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며 경덕궁 안의 승휘전(承輝殿), 어조당(魚藻堂), 만상루(萬祥樓) 등을 헐어 만수전 영역에 이건하는 것이 좋겠다고 명을 내린다. 워낙에 공역이 컸던 만수전 조성은 신료들의 계속되는 반대와 극심한 천재(天災)를 못 이겨 공사가 중단되기를 거듭했지만 1657년(효종 8) 4월, 2년여의 공역 끝에 완공되어 장렬왕후가 거주하였다.

조선의 대비전은 동조를 원칙으로 했으므로, 동쪽에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만수전은 서쪽에 조성하는 파격적인 배치를 단행하였다. 효종의 강력한 영건 의지가 궁궐 제도를 논하며 반대했던 중론을 물리치고 대비전 영역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만수전은 숙종 때까지 장렬왕후의 대비전으로 쓰이다가 1687년(숙종 13)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형태

기록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만수전 영역을 ‘서원(西苑)’,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만수전은 영건 시 크게 두 부분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대비의 정전이 되는 만수전과 부속 건물이 북쪽에 자리 잡았고, 별전으로 지을 춘휘전과 부속 건물들이 남쪽에 자리 잡았다. 영건 당시 효종은 백성의 고초를 생각해야 한다며 경덕궁의 전각을 철거하는 이건을 결정하였다. 경덕궁에서 철거된 전각은 만상루, 흠경각(欽敬閣), 제정당(齊政堂), 비승각(丕承閣), 관문각(觀文閣), 협화루(協和樓), 승휘전, 어조당 등이었다.

『만수전수리도감의궤(萬壽殿修理都監儀軌)』에 따르면 만수전 영역은 만수전, 춘휘전(春暉殿), 천경루(千慶樓), 백복헌(百福軒), 양지당(養志堂), 헌선합 등 부속 건물을 모두 합쳐 170여 칸으로 조성된 거대한 영역이었다. 만수전과 춘휘전은 대비전 영역의 정전과 별전으로 함께 조성되었다. 훗날 만수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전의 터가 되었고 춘휘전은 선원전의 터가 되었다.

만수전은 문헌 사료에만 남아 있는 전각이기 때문에 건축물 형태를 추정하기 어렵다. 경덕궁에서 이건하였다는 승휘전, 만상루, 어조당 등은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 보이는 장락전(長樂殿) 영역의 건물들이었던 것 같은데, 이때 조성된 만수전이 경덕궁의 장락전 형태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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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聾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동궐도(東闕圖)」「서궐도안(西闕圖案)」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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