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각(觀文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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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건립되었던 유럽식[洋館] 2층 건물.

개설

고종이 서구 근대화를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경복궁 내 건청궁(乾淸宮) 침소 인근에 세우게 한 서구식 건물이다. 관문각은 시위대의 교관이었던 윌리엄 막키 다이([茶伊], Dye, William. M)와 러시아인 건축 기사 사바찐([沙婆眞], A. S. Sabatine)의 거처이기도 했다. 1894년(고종 31) 6월에 조직된 경복궁 시위대의 대장이 다이였으며, 부대장이 사바찐이었다. 다이는 1890년(고종 27)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종이 거처하는 궁궐에는 외국인이 2명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종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외국 공사관에 연락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당시 관문각에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위치 및 용도

관문각은 경복궁 내 고종의 거처였던 건청궁 영역에 소재하였다. 고종이 관문각에 거처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던 대전의 계유년 옥책(玉冊)과 옥보(玉寶), 대왕대비전의 계미년 옥책과 기묘년 옥보, 중궁전의 병인년 교명(敎命)과 옥책·금보(金寶) 및 계유년 옥책, 세자궁의 을해년 교명과 죽책(竹冊) 등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었다. 또한 어진도 보관하였는데, 1897년(광무 1) 6월 15일자 관보에 경복궁 내 어진 장소로 관문각이 거론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빈전(殯殿)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으며, 왕실 도서관 내지는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과 같은 기능을 했다고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관문각은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1888년(고종 25) 2월에 친군영(親軍營)에서 다시 세우는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존의 건물을 증축 내지는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25년 2월 13일). 친군영에서는 건물의 수리를 마치고 4월 24일에 관문각의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민용식(閔應植), 서사관(書寫官)에 이승오(李承五),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에 박봉빈(朴鳳彬)을 계청(啓請)하여 차출하였다(『고종실록』 25년 4월 24일). 1891년(고종 28)에도 친군영에서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다. 1896년(고종 33)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파천 이후 황폐화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이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관문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경운궁 공사 시 해체되고 말았다. 1901년(광무 5) 6월 6일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관문각 철훼(撤毁) 운반비’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서 1901년 해체되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형태

1888년(고종 25)부터 1891년 사시에 건물 준공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인 사바찐이 건축 설계를 담당했다고 하며 3층의 유럽식 흰색 건물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시 관문각에 거처하던 미국인 다이와 러시아인 사바찐이 명성황후가 일본 시해단에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우동선, 「경운궁(慶運宮)의 양관(洋館)들」, 『서울학연구』4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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