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기지묘(理氣之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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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기의 오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율곡(栗谷)이이의 학설.

개설

이이(李珥)는 리(理)와 기(氣)를 가지고 본체론과 심성론을 전개하면서 리와 기의 불리적(不離的) 측면에서 리기지묘(理氣之妙) 학설을 전개하였다. 이 학설을 가지고 이황의 호발설(互發說)을 비판하고, 또한 리와 기를 두 존재로 파악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리는 기를 떠나 있을 수 없고 기는 리를 떠나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고수하였다. 만약 리와 기를 두 존재로 여긴다면 도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리기지묘가 두 차례 등장하는데, 이이의 학설과는 거리가 있다.

내용 및 특징

성리학에서 리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다. 이 두 범주적 관계는 하나이면서 둘이고[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이다[二而一]. 리와 기의 이러한 관계를 통해 성리학의 본체론과 인성론을 설명한다.

이이는 리와 기의 개념과 관계를 설명할 때 리를 형이상자로, 기를 형이하자로 여기며,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이미 분리될 수 없다면 그 발용은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리기지묘는 알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리의 근원은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다. 기가 유행하여 고르지 못하면 리 역시 유행하여 고르지 못하니, 기는 리를 떠날 수 없고 리도 기를 떠날 수 없다. 이와 같다면 리와 기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알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형식적 논리와 사고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다. 리와 기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은 근원이 같고 하나임을 명증하는 것이다. 또한 리와 기가 유행시에 유행하는 것은 본래 혼융하여 사이가 없다[混融無間]는 것이다. 이렇게 혼융하여 사이가 없다는 것은 본래 리와 기가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다. 이합이 없기 때문에 리기지묘인 것이다. 이이는 리기지묘를 매개로 하여 이황(李滉)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리기호발의 경향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자신의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를 보면 리기지묘는 심성론적 측면에서 분리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이는 리와 기가 하나인가 둘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전 사람들의 해석을 참고한다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리와 기는 혼연히 간격이 없어서 원래부터 서로 분리할 수 없으니 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기(器)도 도(道)요, 도도 기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서로 분리할 수 없더라도 혼연한 가운데서 서로 섞여 있지 않으니 하나라고 지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리는 리이고 기는 기(氣)이니, 서로 섞여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를 잘 사색한다면 리기지묘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리와 기는 개념과 논리적으로 보면 분리되어 있지만, 본체론적 측면에서는 리와 기를 분리하여 이원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일원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리를 떠난 기도 있을 수 없고 기를 떠난 리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리와 기를 둘로 여긴다면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리와 기는 원래 하나임을 천명하였다.

이이의 리기지묘 학설은 리와 기의 오묘한 조화를 통한 논리로 본체론과 심성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조화의 논리는 한쪽에 치우치려는 사고의 경향을 지양시키고 있다. 그의 학설은 기호 성리학자들에게 전승되어, 한국 성리학사상(性理學史上) 독특한 견해로 평가받는다.

변천

숙종대에 경기·황해도·충청도 3도의 유생 윤수준(尹壽俊) 등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는 과정에서 박세채의 학문 경향을 말하면서 "약관 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학업을 포기하고 용기 있게 사학(斯學)으로 귀의하여 생각을 정밀하게 깊이 연구하면서 진실을 알아 실천하였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학문의 큰 근본을 통찰하여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정자(程子)의 가르침인 ‘경(敬)’자를 공부하는 것을 제일의 뜻으로 삼아 리기지묘(理氣之妙: 리와 기의 오묘함), 심성(心性)의 깊은 뜻, 공사(公私)·의리(義利)의 구분, 왕도(王道)·패도(霸道), 성실·거짓의 구분과 고금의 상례(常禮)·변례(變禮)를 모두 원류를 따져 밝혔는데, 드러난 데에서 은미한 데로 이르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숙종실록』 44년 2월 26일). 리기지묘는 이이가 말하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박세채는 이이가 말하는 리와 기의 불리적 관계에서 리기론이나 심성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사단을 리를 주로 하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한다고 하여 리기호발설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세채에 대하여 리기지묘를 말하는 것은 리기론에 대한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영조대에 성균관 좨주(祭酒)를 지낸 김원행(金元行)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1722년 21세 때 산림에 은거하여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쓰며 학문을 탐구하면서 낙론(洛論)의 주장을 고수하였다. 그가 1772년 졸하니, 『조선왕조실록』 졸기에서 "성명(性命)의 근본을 통견(洞見)하고 리기지묘를 깊이 탐구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공부가 평정(平正)·적실(的實)하고, 의리(義理)를 변별함이 엄확·명쾌하였다."고 하였다(『영조실록』 48년 12월 30일). ‘리기지묘를 깊이 탐구하였다’는 것은 이이의 리기지묘 학설을 깊이 탐구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절충한 조부 김창협의 학설을 계승하면서 리기론을 전개한 것이다.

참고문헌

  • 『율곡전서(栗谷全書)』
  • 윤사순, 『한국유학사-한국유학의 특수성 탐구(상·하)』, 지식산업사, 2012.
  • 이상익, 『기호성리학연구』, 한울아카데미, 1998.
  • 철학사전편찬위원회, 『철학사전』, 중원문화, 1987.
  • 현상윤 저, 이형성 교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심산, 2010.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