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후소생(得後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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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를 얻고 난 후에 그 노비에게서 태어난 자식.

개설

득후소생(得後所生)은 과정이나 경로에 관계없이 노비를 얻고 난 후에 생긴 소생 자식을 말한다. 주로 분재(分財) 후 태어난 노비 자식이나 매득(買得) 후 태어난 노비 자식 등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노비의 경우 그 소생의 신분이나 소유권 귀속 때문에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으므로 득후소생에 대한 처리가 재산권에 있어서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득후소생은 그 노비를 어떤 과정을 거쳐 얻었는지 구분하지 않고 다만 얻은 후 그 노비에게서 태어난 노비를 총칭하는 말이다. 고유한 역사 용어는 아니며, 글자 그대로 획득한 이후에 태어난 자식을 말하는 조어(造語)이다.

득후소생의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로 노비를 매매하거나 상속할 때이다. 매매 이후 태어난 매득 노비의 소생, 재산을 나눠 받은 이후 태어난 상속 노비의 소생은 다시 이를 매매하거나 상속할 필요 없이 그 부모에 종속되어 그 부모를 소유한 사람이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존재를 득후소생이라 하며, 이러한 처리 지침 때문에 득후소생에 대한 논의가 조선전기에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득후소생에 대한 지침은 첫째, 노비 매매 시 그 소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에 나온다. 조선시대 노비 매매 문기(文記)에는 본문 뒤에 "후소생도 아울러 영원히 방매하오니[後所生幷以 永永放賣爲去乎]"라는 구절이 상투적으로 붙는다. 이는 노비를 매득한 주인은 매득한 노비가 소생을 낳으면 그 소생의 소유권까지 가진다는 뜻이다. 즉 계약이 매매한 노비 당사자에 그친다는 핑계로 득후소생을 매도자에게 다시 빼앗기지 않도록 계약서에 상투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분재(分財), 즉 재산 상속에 나오는 득후소생에 대한 지침이다. 1429년(세종 11)에 김무(金務)에 의해 작성된 분재기 중 "이 노비들을 함께 기록하되, 사용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각 후소생은 득후로 시행하여 허여하거니와[右奴婢等乙幷錄爲乎矣 使用已久爲乎等用良 各後所生乙良 得後以施行許與爲去乎在亦]"라는 구절이 있다. 즉, 분재 이전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노비를 이번 분재 시에 함께 기록은 하되, 각각의 후소생은 득후소생의 예와 같이 그 부모가 소속된 분재 받은 상전에게로 자연스럽게 귀속하게 해 준다는 뜻이다. 재산 상속이 이미 완료된 후에 소생이 태어나면 그 부모의 상전이 된 사람이 자연스럽게 득후소생까지 소유하게 되는 관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재산 상속 중 득후소생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신노비(新奴婢) 득후소생에 있다. 신노비는 혼인할 때 부모에게 받는 노비로 자녀들의 혼인 때마다 동일한 숫자의 노비를 주고 정식 재산 상속 시에 분재기에 등재하는 노비이다. 따라서 혼인할 때 받은 신노비는 분재기 작성 시에는 그 수가 증가한 경우도 있고 감소한 경우도 있어 자녀들 간에 노비 수에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자녀 간 균분 상속을 재산 상속의 이념으로 하던 조선전기에 이러한 신노비 수의 차이는 균분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차례 논란이 되었다. 특히 중종 때 신노비 득후소생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당시에는 정해진 법규보다는 과거에 하던 대로 실정과 청원을 들어주면서 득후소생을 나누기도 하고 나누지 않기도 하며, 자녀 수가 많고 노비 수가 적으면 장유(長幼)의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쓰도록 하는 등 민의를 따르는 방향으로 대신들의 의견이 모아져 논쟁을 해결했다(『중종실록』 6년 3월 1일).

균분이 철저했던 조선전기에는 신노비 득후소생을 다시 모아 재분배하는 경우가 보이나, 조선후기로 올수록 원래 신노비를 소유한 자가 그 소생을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분재기에 신노비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후소생도 아울러[後所生幷以] 함께 분재한다."는 문구가 삽입되고 있는 것은 신노비 득후소생의 재분배 관행이 사라졌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변천

중종대에 수교(受敎)를 통해 "유모와 신노비의 득후소생은 나눠주지 않는다[乳母新奴婢得後所生勿分給]."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송이 여러 차례 발생하자 사헌부가 이 조항이 불합리하다는 내용의 건의를 왕에게 올렸다. 즉 노비가 이미 혼인한 경우에는 소득이 많아지나 아직 나이가 어려 혼인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득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종은 과거에 장례원에서 취품(取稟)하여 논의를 거쳐 결정한 사안이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전교(傳敎)를 내렸다(『중종실록』 6년 2월 21일).

그 후에도 유모·신노비의 득후소생 처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전교는 바뀌지 않았다. 관행을 반영하여 법규가 만들어졌고, 또 득후소생을 한데 모아 다시 분배한다면 송사의 꼬투리가 되어 폐해가 발생한다는 의견을 따른 것이다. 득후소생에 대한 논란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점차 사라졌는데, 득후소생이 관행적으로 매매·분재 대상인 부모를 따라가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수교집록(受敎輯錄)』
  •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 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 이수건 편,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 이재수, 『조선 중기 전답 매매 연구』, 집문당, 2003.
  • 문숙자, 「조선시대 의례 관련 노비와 그 분재(分財)」, 『고문서연구』9·1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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