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진(東萊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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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국방상의 요충지로 평가되어 경상도 동래에 설치한 진(鎭).

개설

조선 건국 후 동래는 처음에는 현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동래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태조대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군사적 역할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합포(合浦)·강주(江州)·영해(寧海)와 함께 경상도에 새로 설치한 4진에 포함되었다. 이후 동래진으로 계속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왜구 문제 같은 일본과의 관계 등으로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동래현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기장(機張)까지 15리(약 6㎞), 서쪽으로 양산(梁山)까지 32리(약 12.6㎞), 남쪽으로 대해(大海)까지 19리(약 7.5㎞), 북쪽으로 양산까지 22리(약 8.6㎞)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조대에는 동래진의 중익을 동래, 좌익은 기장, 우익은 울산이 되도록 조치했다.

동래에는 2개의 석성(石城)과 온천(溫泉)·해운대(海雲臺) 등이 함께 있었다. 아울러 2개의 역(驛)과 목장이 있었다. 480필의 국마(國馬)를 키우는 목장은 동평현 남쪽 22리 되는 오해야항(吾海也項)에 있었고, 419필의 국마를 키우는 다른 목장은 남쪽 석포(石浦)에 있었다. 그리고 3기의 봉화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동래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두어 부산포(釜山浦)·다대포(多大浦)·서생포(西生浦)·개운포(開雲浦)·두모포(豆毛浦)·서평포(西平浦)·걸이포(乞伊浦) 등 속진(屬鎭)을 직접 관할하도록 했다. 아울러 65척의 전함을 배치해 두었다. 동래진은 조선초기에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귀양지로도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본래 장산국(萇山國), 내산국(萊山國), 거칠산국(居漆山國) 등으로 불렸는데, 신라가 차지한 뒤 거칠산군이라 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양주(良州) 영역의 동래군으로 고쳐 동평(東平)·기장(機張)의 두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1018년(고려 현종 9) 울주(蔚州)의 임내(任內)로 하여 뒤에 현령을 두었다.

조선 태조가 처음으로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겸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고 뒤에 현령으로 바꾸었다. 그 뒤 1547년(명종 2)에 왜인의 상륙 지점이라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이곳을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군사적 임무 등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1895년(고종 32)에는 동래부가 되어 관찰사가 10개 군을 관할하는 치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경상남도에 편입되었으며 도청은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장군과 통합하여 동래군이 되었다. 1951년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동래 출장소가 설치되고 1957년에 부산시 동래구로 변경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조대 설치되었던 동래진은 세종대 부산포와 더 가까웠던 동평진(東平鎭)으로 병마를 옮기기도 했다(『세종실록』 21년 11월 25일). 이 조치를 통해 동래진의 군사적 역할이 축소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왜적 방어 임무 자체가 변동되지는 않았으며 문종대에는 화차(火車) 10부(部)를 배속받기도 했다(『문종실록』 1년 8월 18일). 이 조치를 통해 동래진의 군사적 중요성이 계속 인정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동래부지(東萊府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영남읍지(嶺南邑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립지리원, 『한국지명요람』, 국토지리정보원, 1982.
  •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지』, 부산시,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