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봉대(東臺烽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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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에 전 영변부사 민태혁의 건의에 따라 평안도 영변부 약산동대에 복설(復設)한 봉수.

개설

동대봉대는 조선전기에 설치되어 운용되다가 철폐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 복설되었다. 중앙으로 연결되는 봉수가 아니었던 만큼 운용과 관련한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철폐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평안도 영변부 약산성(藥山城)을 방호하기 위해 18세기 후반에 복설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93년(정조 17)에, 영변부사를 지낸 승지 민태혁(閔台爀)이 약산동대(藥山東臺)에 봉대(烽臺)를 복설할 것을 건의한 기록이 실려 있다. 영변은 본래 천연의 요새인데 병영을 혁파하면서 중간에 봉수를 설치하지 않아 단지 40리 밖의 덕산봉수(德山烽燧)만 있으므로, 그 사이에 가로막힌 것은 많고 중간에 봉수가 없기에 이괄의 난 때에도 닷새가 지난 뒤에야 그 소식을 들었으며, 성을 지키는 막중한 지역의 방비가 이를 데 없이 소홀함으로 봉대를 복설해야 한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7년 6월 26일).

고지도의 봉수 표기

동대봉대는 고지도를 통해 구조와 형태, 거화 모습 및 관련 시설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의 「영변부지도(寧邊府地圖)」를 살펴보면 읍성 안에 1633년(인조 11)에 축조된 약산성이 있는데, 그 안에 붉은색의 불꽃 모양을 그린 뒤 왼쪽에 세로로 ‘烽燧(봉수)’라고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서성진지도(西城鎭地道)」에서는 약산성 서장대(西將臺) 오른쪽에 연굴(烟窟) 5기와, 거화 모습을 붉은색의 삼각형 모양으로 선명하게 표시한 뒤 그 위에 ‘藥山烽燧(약산봉수)’라고 표기해 놓았다. P00012559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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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주홍, 『북한의 봉수』, 서경문화사, 2011.
  • 서울대학교 규장각, 「西城鎭地道」, 『朝鮮後期 地方地圖 -平安道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 서울대학교 규장각, 「寧邊府地圖」, 『朝鮮後期 地方地圖 -平安道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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