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봉수(德山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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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에 신설되어 평안도 영변부(寧邊府)에 속하였던 봉수.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발간을 전후한 18세기 중엽에 신설되었다. 평안도 영변부에 속하였는데, 부의 서쪽 43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북쪽으로 율고개봉수(栗古介烽燧)와 25리, 남쪽으로 박천군의 봉인산봉수(鳳麟山烽燧)와 20리 거리에서 호응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덕산봉수는 조선후기에 신설된 봉수로, 북쪽으로 율고개봉수, 남쪽으로 박천군 봉인산봉수에 응하기 위한 봉수로 설치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제3봉수로 간봉 제2노선에 속하였다.

덕산봉수가 있었던 영변은 본래 천연의 요새지였지만 병영을 혁파하면서 중간 지점에 봉수를 설치하지 않아서 40리 밖의 덕산봉수만이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1793년(정조 17) 전 영변부사민태혁(閔台爀)의 건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태혁은 실제로 영변과 덕산봉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은 많고 중간에 봉수가 없어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닷새가 지난 뒤에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영변부의 약산동대(藥山東臺)에 봉대(烽臺)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정조실록』 17년 6월 26일).

조직 및 역할

덕산봉수는 영변부에 속한 율고개봉수와 동일하게 봉군(烽軍) 105명, 보(保) 16명이 소속되어 입번(入番)하였다.

변천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폐지되었고,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철폐되었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