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용산성(禿用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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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성주의 독용진에 축조한 산성.

개설

경상도 성주(星州)의 독용은 요충지는 아니었지만 산이 험해 병란을 피하기 적합하다 하여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기 시작해 1676년에 완성했다. 성주의 대장 휘하의 병사인 아병(牙兵)이 산성을 지켰다.

위치 및 용도

독용은 큰길에서 매우 멀어서 방어에 좋은 요충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산의 형세가 가파르고 험하여 병란을 피하기에는 적합했다.

변천 및 현황

1675년 6월 경상도관찰사정중휘(鄭重徽)가 쌓기를 청하여 그해 10월에 쌓아 1676년 1월에 이루어졌다(『숙종실록』 1년 6월 6일). 독용산성은 본 읍인 성주의 아병이 그대로 지키면서 보수하도록 하며 또 병사를 시켜 순심(巡審)하여 수선하고 봄·가을에 군사 연습한 것도 반드시 보고하도록 했다. 1868년(고종 5)에 독용산성의 군량이 전혀 없다고 하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위해 따로 준비해 둔 비용 중에 남은 돈 750냥을 먼저 획부(劃付)한 다음 아울러 고을 백성들의 의연금과 목사(牧使)의 성금을 주어 조 1,000석과 소금 100석을 사들여 별도의 비용으로 삼게 했다(『고종실록』 5년 11월 5일).

형태

955m의 독용산(禿用山)을 중심으로 하여 정상부를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중앙정부에서 임시로 파견한 관리자인 별장(別將)이 배속되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이원정(李元楨)이 성주에 있었는데 그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스스로 피난할 계책으로 성을 쌓고자 하였다. 경상도관찰사인 정중휘는 이원정과 집안 간에 혼인 관계를 맺은 사이였고, 권대재(權大載)는 이원정의 심복이었다. 그래서 이원정의 뜻을 받아서 다 함께 ‘성을 쌓을 만하다.’고 한 것이다. 남도의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가 또 성을 쌓는 역사(役事)까지 겹치게 되니,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널려서 ‘무용산성(無用山城)’이라고 하였다(『숙종실록』 1년 6월 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