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지설(道詵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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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유행했던 풍수설 가운데 하나인 비보설(裨補說)로서 신라 말 도선(道詵)이 주창한 설.

개설

도선은 신라 말 선승이자 풍수승으로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고칠 수 있는 비보진압설을 강조한다. 지나치게 지기가 강한 곳은 눌러주고[鎭壓], 약한 곳은 보충해준다[裨補]는 것이 그 핵심이다. 고려왕조에서 크게 성행하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초기에 잠시 수용되다가 사술로 비판받아 사라진다.

내용 및 특징

고려에서 도선의 주장은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지만, 유교를 국교로 표방한 조선에서 도선지술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조선초기 한양 도읍지 조성 당시 수구(水口)가 허하다는 이유로 수구처에 가산(假山)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한 것이나 한양 주변에 비보사찰을 세운 것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으나 거의 형식적이었다. 도선지술이 조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1485년(성종 16) 유학자 출신의 풍수학인 최호원(崔灝元)에 의해서이다. 당시 병조 참지의 직위를 가진 최호원이 극성(棘城) 지방으로부터 돌아와서 도선의 비보풍수를 시행하자는 상소를 올린다. 도선의 술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것은 조선이 개국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해도에 간 최호원은 고을에 따라 악병이 심한 곳이 있고 심하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 원인이 산천 지형·지세의 험하고 순함과 득수득파(得水得破)의 좋고 나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대처하는 방법으로 도선의 산천비보설을 시행하자고 주장하였다. 도선의 비보풍수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이며, 도선의 술이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최호원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와 논의로 조정은 시끄러워진다. 그러자 성종은 그의 직첩을 빼앗고 유배시키는 것으로 논란을 매듭을 짓는다(『성종실록』 16년 1월 17일)(『성종실록』 16년 2월 1일). 최호원의 파면은 도선의 술이 조선에서 더 이상 수용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변천

도선의 술법은 고려에서는 『옥룡기(玉龍記)』, 『도선밀기(道詵密記)』 등 수많은 형태의 저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잠깐 부분적으로 시행되지만 성종 때 도선의 술법을 주창한 최호원이 유배를 가는 사건으로 더 이상 수용되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도선의 비보풍수의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 최창조, 『한국의 자생풍수』, 민음사, 1997.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최병헌,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 『한국사연구』 제11호,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