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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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초(李岹)의 무덤.

개설

중종의 7남으로, 어머니는 창빈안씨(昌嬪安氏)이다. 1530년(중종 25)에 태어나 1538년(중종 33)에 덕흥군에 봉해졌으며, 1559년(명종 14) 5월 9일에 3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덕흥군의 3남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1569년(선조 2)에 덕흥군을 높여 대원군으로 삼았다(『선조수정실록』 2년 11월 1일). 또한 중국 송나라의 영종이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한 전례에 따라 봉작(封爵)과 묘에 대한 제사를 정하였다(『선조실록』 10년 3월 24일)(『선조실록』39년 9월 2일).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능’이나 ‘원’이 아니라 ‘묘’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이후 대원군 무덤의 호칭을 정하는 선례가 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4년 4월 3일). 묘역은 1980년에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1559년에 덕흥군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9월 17일에 사패지(賜牌地)인 양주 남면 수락산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후 1567년(명종 22)에 부인 정씨가 병을 얻어 죽자, 1568년(선조 1) 8월 9일에 그 좌측에 왕비의 부모를 장사하는 예에 따라 장사를 지냈다.

조성 상황

봉분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와 쌍분으로 조성하였으며, 팔각형의 호석을 둘렀다. 상계의 중앙에는 묘표와 상석을 설치하였다. 상석은 고복석 없이 계체석 위에 바로 올려놓았다. 하계에는 상석 앞에 향로석과 팔각형의 장명등을 중앙에 두고, 그 좌우에 망주석과 무인석(武人石)을 1쌍씩 배치하였다. 대개 사대부의 묘에는 문인석(文人石)을 설치하는데, 특이하게도 무인석만 설치하였다.

묘역의 아래쪽에는 귀부에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은 신도비가 있다. 1673년(선조 6)에 세웠는데, 비문은 홍섬(洪暹)이 짓고 글씨는 송인(宋寅)이 썼다.

관련 사항

묘역 아래쪽에는 그의 장남 하원군(河原君)이정(李鋥)의 묘가 있다. 인근에는 덕흥대원군과 그 부인 안씨, 하원군의 위패를 모신 덕흥사(德興祠)가 있으며, 덕흥대원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願刹)로 지정한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덕흥사는 덕릉 재실(齋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덕흥대원군묘의 재실이었으나, 1950년대에 덕흥대원군의 사당인 덕흥궁이 없어지면서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덕흥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인재집(忍齋集)』
  • 경기도박물관, 『경기묘제석조미술』, 주자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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