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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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덕천군 이후생 |
한글표제 | 덕천군 이후생 |
한자표제 | 德泉君 李厚生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태조~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봉작 | 덕천군(德泉君), 덕천정(德泉正), 덕원정(德原正) |
시호 | 적덕(積德)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397년(태조 6) |
사망 | 1465년(세조 11)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방과(李芳果): 정종(定宗) |
모_외조 | 지성빈(池誠嬪): 지숙의(池淑儀), 충주 지씨(忠州池氏), 지윤(池奫)의 딸 |
형제 | (형)이원생(李元生): 의평군(義平君) (형)이무생(李茂生): 선성군(宣城君) (동생)이호생(李好生): 임성군(任城君) (동생)이말생(李末生): 도평군(桃平君) (누이)함양옹주(咸陽翁主): 박갱(朴賡)의 처 |
처_장인 | 장수 이씨(長水李氏) 이종우(李從茂)의 딸 →(자녀)4남 5녀 |
자녀 | (1자)이효백(李孝伯): 신종군(新宗君) (2자)이효숙(李孝叔): 부윤정(富潤正) (3남)이효성(李孝誠): 운수군(雲水君) (4남)이효창(李孝昌): 송림군(松林君) (1녀)성찬(成瓚)의 처 (2녀)신갑지(申甲之)의 처 (3녀)원중서(元仲樨)의 처 (4녀)전의인(全義人)의처 (5녀)박계호(朴季孝)의 처 (서1녀)구세기(具世棋)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
총론
[1397년(태조 6)~1465년(세조 11) = 69세]. 조선 전기 태조~세조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0왕자. 봉작(封爵)은 덕천군(德泉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지성빈(池誠嬪)인데, 숙의(淑儀)였다가 성빈(誠嬪)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충주 지씨(忠州池氏)로서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지윤(池奫)의 딸이다. 지성빈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덕천군이후생은 그 중 셋째 아들이다. 동복 형은 의평군(義平君)이원생(李元生), 선성군(宣城君)이무생(李茂生)이고, 동복 동생은 임성군(任城君)이호생(李好生), 도평군(桃平君)이말생(李末生)이며 동복 누이는 함양옹주(咸陽翁主)다. 정종은 적실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례와 제사 때에 의평군이원생이 맏아들 역할을 하였다. 지윤의 맏딸은 태조이성계(李成桂)의 맏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이방우(李芳雨)의 정실부인이 되었으나, 지성빈은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 지윤이 최영 · 이성계에게 패망한 뒤에 지씨 집안이 몰락하여 후실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이방과가 정종이 되자, 후궁으로 봉해졌다.
기민 구제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덕원정(德原正)에 봉해졌고, 1460년(세조 6) 11월 덕천군으로 봉해졌다. 그 뒤에 69세까지 사는 동안 왕자이면서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농사철이 되면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고, 가난한 이웃을 지성으로 도왔다. 어느 해 여름에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그들을 구제(救濟)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왕자로서 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고도 불렸다. 기민과 이재민을 구제한 것으로 백성들에게 덕을 쌓았다 하여 적덕(積德)이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덕천군파종의 출세
덕천군의 적덕은 적선(積善)으로 이어져 내려와 후손에게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여 네 아들의 후손은 번성했다. 후일에 덕천군의 후손 중에서 영상(領相) 1명, 봉군(封君) 12명, 증군(贈君) 20명, 공신(功臣) 6명, 어사(御史) 18명, 문과 장원(文科壯元) 15명, 무과(武科) 장원(壯元) 3명, 문과(文科) 급제(及第) 57명, 사마(司馬) 장원(壯元) 11명을 배출했다. 가문에 문집이 많기로 유명하고,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맥을 형성한 파종인데, 집안에 간직한 서적이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만큼 많았다고 한다.
성품과 일화
그는 벼슬을 탐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흉년에는 농사를 지어 기민을 구제한 왕자이다. 어머니 지성빈은 흰 기린 꿈을 꾼 뒤 그를 낳았다고 전한다. 기린은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전조로 나타난다는 상상의 상서로운 동물이고, “생명이 있는 것은 밟지도 먹지도 않는다.”고 한다. 정종은 그가 천성적으로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어 이름에 ‘후(厚)’자를 넣어 지었다고 전한다. 네 아들과 후손들이 모두 훌륭한 기린아(麒麟兒)가 태어나 덕천군파를 형성할 만큼 번성하였고, 입신출세한 이들이 많은 것은 적선한 공의 덕이니, 태몽이 성몽(聖夢)이었음을 점지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태종을 연회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는데, 식사 중에 독충이 나와 뱉어냈다고 한다. 이때 그가 이는 독충이 아니라 곡충이라고 먹었으므로 음식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주 이씨 덕천군파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적덕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남한산성(南漢山城)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에 있었는데, 1974년 충남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로 이장하였다. 1872년(고종9)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 장수 이씨(長水李氏)는 이종우(李從茂)의 딸인데, 4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효백(李孝伯)이고, 차남은 이효숙(李孝叔)이며, 3남은 이효성(李孝誠)이고, 4남은 이효창(李孝昌)이다. 장녀는 성찬(成瓚)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신갑지(申甲之)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원중서(元仲樨)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전의인(全義人)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박계호(朴季孝)의 처가 되었다. 서녀는 구세기(具世棋)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