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송도감(斷訟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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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에 일시로 운영한 노비 소송 재판 기구.

개설

단송도감은 성종대에 적체된 노비 소송을 심리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한 노비 소송 재판 기구이다. 세 곳에 청사를 설치하고, 노비 소송을 처리했다. 1481년 1월에서 5월까지 운영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부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세워 노비 소송을 집중적으로 처리하였다. 조선도 개국 초부터 노비변정도감을 운영하였다. 세종대 이후로는 노비변정도감의 설치를 자제하고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 소송을 전담하게 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래 노비 소송이 증가하더니 1481년에는 한 해에 접수된 소송이 700건이나 되는가 하면 장예원에 계류 중인 소송만도 400건이나 되었다. 이러한 노비 송사의 증가는 노비가 재산시되고 양반생활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비 소송의 주원인은 노비 상속을 둘러싼 가족, 친인척 간의 분쟁이나 권세가가 강제로 양민을 노비로 삼은 것에 대한 신원이었다. 정부는 소송으로 인한 가족 갈등과 사회 갈등을 해결해야 했고, 이 시기 급속하게 진행되는 양인의 감소에도 대응해야 했다. 성종은 적체된 노비 소송을 집중적이고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1481년 1월 4일 특명을 내려 단송도감을 설치하였다. 또 성종은 엄명을 내려 미결된 소송 900여 건 중 830여 건을 단송도감에 이관하고 이해 안에 노비 소송을 처리할 것과 강경한 원칙을 세워 사심을 버리고 공정하게 재판하라고 하였다. 재판은 한 번만에 끝내고 단송도감에서 내린 판결은 재심할 수 없으며 판결에 대해 격쟁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고의로 출석을 기피하거나 재판 중에 농사를 구실로 귀향하는 사람은 패소(敗訴)로 인정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적체된 노비 소송을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단송도감이라는 이름도 성종이 직접 명명한 것으로 이 기구로 노비 소송을 종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성종실록』 12년 1월 4일).

조직 및 역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 성종은 최고의 인재를 투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결송 당상관으로 이극배(李克培), 윤계겸(尹繼謙), 한한(韓僴), 문수덕(文修德), 이시보(李時珤), 이육(李陸)을 임명하고, 낭청(郎廳)으로 정영통(鄭永通), 구치곤(丘致崐), 최호원(崔灝元), 강귀손(姜龜孫), 김제신(金悌臣), 이의(李誼), 이숙감(李淑瑊), 김여석(金礪石), 남제(南悌)를 임명했다. 판결사 1·2명이나 당상관 1명을 두던 이전의 변정도감에 비해 파격적인 인사였다.

단송도감을 운영하자 재판을 너무 속결로 한다는 비판과 단심제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니 2심, 3심제로 해야 한다는 건의가 빗발쳤으나 성종은 강경한 의지로 단송도감 운영을 강행했다.

변천

단송도감은 1481년 5월 적체된 노비 소송을 완료하고 혁파되었다. 이로써 당시의 숙원이던 노비쟁송이 일단락되었고, 고의적인 노비 소송과 가족 간의 분쟁을 소송을 통해 해결하려는 풍조를 억제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무리한 운영이었다는 비판이 따랐고, 노비 소송을 종식시킬 수도 없었다. 단송도감은 이런 과감한 방법으로도 노비 변정 방식으로는 노비 소송을 억제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을 뿐이었다(『중종실록』 11년 1월 3일). 그 결과 단송도감은 다시는 설치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조윤선, 『조선 후기 소송 연구』,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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