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원(掌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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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 문서 및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조선시대 장예원은 노비와 관련된 일을 총괄하던 관서이다. 공노비 관련 장부의 작성 및 보관을 비롯해 노비 소송을 관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예원은 1467년(세조 13) 노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 앞선 형조도관과 변정원을 계승한 것이었다. 1392년(태조 1) 형조도관을 두어, 노비 관련 사무를 관장하였으나, 노비 소송이 빈번해지면서 1395년(태조 4) 이에 대신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노비변정도감은 이후 몇 차례 치폐를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이를 확대하면서 상설기구로 변정원을 설치하였다가 다음 해 장예원으로 개정하였다. 형조의 속아문(屬衙門)이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형조도관 당시 직제는 종3품 지사 1명, 정4품 의랑 2명, 정5품 정랑 2명, 정6품 좌랑 2명, 정7품 주사 2명, 8품의 영사 6명을 두었다. 이후 1466년 변정원이 설치되면서 정3품 당상의 판결사 1명, 정5품의 사의 1명, 정6품의 사평 3명을 두었는데, 다음 해 장예원으로 개편되면서 일부 인원 변동이 있었으나 직제는 그대로 계승하여 『경국대전』에 판결사 1명, 사의 3명, 사평 4명으로 규정되었다. 이속으로 서리 32명과 사령 20명이 배속되었다. 사의 이하 관원은 사간원·사헌부의 서경(署經)을 거쳐야 하였다.

장예원은 공노비의 관리를 담당하였는데, 이에 대한 관리를 위해 노비안(奴婢案)을 3년마다 속안(續案)을, 그리고 20년마다 정안(政案)을 작성하여 본원 및 의정부·형조·사섬시 등에 보관하였다. 장예원은 또한 지방에서 선발되는 선상노(選上奴)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선상노 관리의 경우, 1470년(성종 1) 9월 담당 아전들이 빈부에 따라 선상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이를 형조로 이관하였다(『성종실록』 1년 9월 5일). 또한 죄인에게 적몰한 노비의 관리도 아울러 담당하였다(『세조실록』 13년 11월 18일).

장예원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노비 관련 송사를 처리하는 것인데, 관련 소송이 지체되는 폐단이 있어 성종대에는 결송도수(決訟度數)를 매달 보고하도록 하고, 3개월 단위로 현황을 정리하여 소사(小事)는 30건, 대사는 20건 이하인 관원은 강등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

변천

소송 업무와 관련해서 겸판결사가 수시로 설치되었는데, 예컨대 1470년 장예원 당상관은 1인인데, 만약 1인이 유고한 경우 판결이 지체될 수 있다고 지적한 구치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겸판결사가 일시적으로 설치된 적이 있었다(『성종실록』 1년 3월 26일).

1516년(중종 11)에도 역시 겸판결사 1원을 더 두었다가 1520년(중종 15)에 폐지하였고, 뒤에 사의 2원, 사평 2원을 축소하였다. 1764년(영조 40) 장예원을 혁파하고, 대신 보민사(保民司)를 설치하면서 각 도에서 징수된 속전(贖錢)을 법부(法部) 소속 이예(吏隸)들에게 지급하는 경비로 충당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오갑균, 『조선시대 사법제도 연구』, 삼영사, 1995.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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