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복(蘿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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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화과에 속하는 1년생 또는 2년생 채소.

개설

조선시대에 무는 김치, 국, 떡, 나물 등 각종 음식의 재료로 이용되었으며, 구황식품으로도 주목받았다. 특히 움에 저장해 두었다가 꺼내면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의 맛을 볼 수 있는 데다, 무나 무청으로 무말랭이와 시래기를 만들어 둘 수도 있어서 저장성이 높았다.

원산지 및 유통

조선시대에 나복은 현재의 무를 지칭하며, 순무는 만청(蔓菁)이라 불렀다. 무와 순무는 음식을 만들 때 호용되는 재료였는데, 특히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무를 꺼리는 선조에게 약방에서 무 대신 순무를 쓰도록 하였다(『선조실록』 41년 1월 7일).

무는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 연안이 원산이며,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경기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재배되었기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 공물로 진상하지는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특정 지역의 공물이나 토산물로 기록되지 않았고, 나복자(蘿葍子) 즉 무씨가 경기도에서 재배되는 약재로 등장한다. 무씨는 『승정원일기』 1720년(숙종 46) 4월 24일 기사에 의하면 시약청(侍藥廳)에서 나복자차를 달여 올렸다거나, 1721년(경종 1) 12월 24일 기사처럼 약방에서 이모해수탕(二母寧嗽湯)과 같은 탕약을 지을 때 첨가하는 약재로 썼다.

왕실에서 소용되는 무 가운데 각종 제례에 쓸 청근저를 담그는 데 필요한 것은 『승정원일기』 1741년(영조 17) 4월 8일과 1756년(영조 32) 6월 13일 기사에서 보듯이 따로 위전을 두어 재배하였고, 그 밖에 창덕궁 돈화문 밖의 내농포(內農圃)에서도 조달하였다. 그런데 내농포의 하인들이 강외(江外) 지방을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친 일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공상(供上)이라는 핑계를 대며 백성들의 밭에 있는 채소를 함부로 탈취하고, 심지어 추수 후에 저장해 둔 무까지 캐 갔기 때문이다(『현종실록』 1년 8월 5일).

겨울철에 무를 저장하는 방법은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나복만청근수장법(蘿葍蔓菁根収藏法)을 보면, 서리가 내린 후에 뽑은 무 가운데 온전하고 큰 무를 가려서 무의 밑동과 머리 부분을 잘라 인두로 지진 후 움 속에 저장하면 싹도 나지 않고 속도 비지 않아 봄까지 햇무처럼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연원 및 용도

조선시대에 기근을 대비한 구황식품으로 무의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였다. 세종은 무가 구황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식물인데도 그 이점을 모르는 백성들은 무를 그저 겨울철에 먹는 소채로만 이용할 뿐이고 아직 많이 심지 않으니, 매년 봄철에 무씨를 많이 채취하여 비축해 두었다가 그해 농사가 풍년이든 흉년이든 상관없이 가을에 많이 심어 항상 구황에 대비할 방도를 논의했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28일).

조선시대의 조리서에는 무를 주재료로 하는 음식으로 무동치미·섞박지·나박김치·짠지·젓무·무황아김치와 같은 김치류, 무생채·무나물과 같은 나물류, 무떡 등이 보인다. 특히 조선후기에 배추가 널리 재배되기 전까지는 무를 소금이나 젓갈로 염장한 무김치 또는 무짠지의 형태가 김치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만드는 법 중에 김치류의 비중이 높았다. 무로는 무말랭이도 만들었는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혀 물자가 부족했던 인조에게 한흥사(漢興寺)의 승려 희안(希安)이 바친 물품 중에 있던 나복채(蘿葍菜)가 바로 무말랭이이다(『인조실록』 14년 12월 2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산림경제(山林經濟)』
  • 한국식품과학회, 『한국과학기술대사전』, 광일문화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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