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羅經)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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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경 |
한글표제 | 나경 |
한자표제 | 羅經 |
동의어 | 나반(羅盤), 나침반(羅針盤), 범철(泛鐵), 사남(司南), 윤도(輪圖), 지남(指南), 패철(佩鐵) |
관련어 | 득수득파(得水得破), 좌향(坐向), 토규(土圭)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두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경(羅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7년 4월 4일, 『세조실록』 13년 3월 15일, 『선조실록』 33년 9월 21일 |
풍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침반.
개설
상주는 풍수에 속고, 풍수는 나경에 속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나경에 관해 다양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또한 이것은 풍수가 보편성이 없는 잡술이라고 비판을 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경은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며 오랜 역사에 걸쳐 오늘날의 나경으로 변화되어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풍수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나경은 1600년(선조 33) 조선에 처음 소개된다. 나경은 좌향을 측정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길흉화복을 예단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 중요함이 경전(經典)과 같다고 하여 나경이라고 불렀다.
내용 및 특징
나경은 패철(佩鐵), 혹은 쇠라고도 한다. 나경의 초기 원형은 이미 주대(周代)에 토규(土圭)가 사용되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인 『장서(葬書)』에도 토규로는 그 방위를 측정하고, 옥척(玉尺)으로는 그 멀고 가까움을 측정한다고 하였다. 풍수에서 최초로 방위와 거리를 측정한 것은 토규와 옥척이었으며 이것이 훗날 나경의 토대가 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송나라 때의 풍수서 『최관편(催官篇)』에도 방위 측정에 토규를 쓴다는 문장이 있는 것을 보아, 토규는 송나라 때까지도 계속 활용되었고, 현재 시중에 풍수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나경은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사남(司南) 또는 지남(指南)이라는 도구를 발명하여 방향을 측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또한 오늘날의 나경 형성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동한(東漢) 초의 학자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남쪽을 가리키는 도구를 땅에 던지면 그 밑 부분이 남쪽을 가리킨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미 당시에 자침과 나반을 갖춘 것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토규와 지남 등이 병존하면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구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정침(正針) 이외에 봉침(縫針)과 중침(中針)이 추가되었으나 그 본질은 잊힌 채 명나라 때에는 침법(針法)에 대한 유파가 생기기 시작하여 나경에 관한 혼란이 시작된다.
나경 용법에 관한 혼란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심해진다. 삼침(三針)이란 나경에 표시된 3개의 24방위 층을 말한다. 삼침은 정침, 봉침, 중침으로 나경의 한가운데에서부터 순서대로 정침, 봉침, 중침이 표시한다. 현재 통용되는 나경은 그 층 사이에 다양한 글자들이 표기되어 있으나 일관된 모습은 아니다.
현재 시중에 사용되고 있는 나경은 정유재란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없었다. 조선초기인 1445년(세종 27) 대신 정인지(鄭麟趾)가 세종의 수릉(壽陵) 선정 시 방위를 측정할 때 규형(窺衡)과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측량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세조는 규형과 기능이 같은 인지의(印地儀)를 직접 제작하였다는 기록도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세조실록』 13년 3월 15일).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규형과 인지의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으며 정확하게 나경이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1600년(선조 33) 중국인 이문통(李文通)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경과 윤도(輪圖)에 대해 윤근수(尹根壽)와 선조가 나눈 대화에서, 윤근수가 이문통이 나경이란 것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윤도처럼 생겼으며, 단지 더 자세하여 내면과 외면에는 각양의 양식이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왕에게 아뢰는 내용이 있다(『선조실록』 33년 9월 21일). 이어 이문통에게 나경과 같은 것을 제조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거나, 광화문 안의 어로 위에 나경을 놓아보고서 정전의 위치를 정하려 했다는 것을 통해 이문통은 나경을 조선 조정에 소개했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많은 풍수술서(風水術書)에서 나경이 중국 황제에 의해 제작되었다거나, 당나라 때 양균송(楊筠松)이 제작하였다거나, 도선(道詵) 국사(國師) 이래 활용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변천
나경은 방위를 측정하는 도구인데, 방위 측정의 초기 도구는 작대기 모양의 표, 토규였다가, 식반, 점반, 사남, 지남 등을 거쳐 지금의 나반으로 정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쇠’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했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두규, 『풍수학사전』, 비봉출판사, 2005.
- 김혜정, 『풍수지리학의 천문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신광주, 『풍수지리학』(1), 명당출판사, 1994.
- 王振鐸, 「司南指南針與羅經盤」, 『中國考古學報』第3-5冊, 商務印書館,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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