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징(權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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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8년(중종33)∼1598년(선조31) = 61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굉(權硡)의 아들이고 형조 참판권첩(權怗)의 아버지이다. 또 송승은(宋承殷)의 외손자이고, 이효언(李孝彦)의 사위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2년(명종17)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고, 다음해 병조 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직하여,『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서 도승지에 승진하였고,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을 때 경내에 정여립(鄭汝立)이 살고 있었으나, 그 사람됨을 꺼려하여 교유를 끊고 만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정여립 일파가 그를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좌천시켰으나,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형조 참판을 거쳐서, 충청도관찰사 ·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589년(선조22) 병조 판서로 승진하였으나,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파라고 내몰려서,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91년(선조24)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마침 정철이 관서 지방에 안치(安置)되었는데, 그가 정철과의 교유를 신속히 끊지 않는다고 탄핵당하여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경기도 지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특별히 그를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 그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수비하였는데,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기 위하여 병력을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에게 넘겼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임진강을 수비하라.”고 명하자 패잔병을 이끌고 임진강을 방어하며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임진강 방어가 무너지자, 삭령(朔寧)으로 들어가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도원수권율 등과 함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의병을 규합하여, 1593년 2월 20일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서울 도성에 주둔한 왜적과 싸워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1593년(선조26)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명(明)나라 제독이여송(李如松)이 일본과 화의를 추진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해 공조 판서가 되어 왜병이 도굴한 선릉(宣陵: 성종 왕릉)과 정릉(靖陵: 중종 왕릉)을 보수하였다. 1594년(선조27) 호조 판서로 임명되었다.

묘소와 비문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월천리(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4)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全)』
  • 『상촌집(象村集)』
  • 『청음집(淸陰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애집(西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