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기(權正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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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2년(명종17)∼1611년(광해군3) = 50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유일(遺逸). 자는 근지(謹之)이고, 호는 각회(殼晦)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이조 판서권극례(權克禮)의 아들이며, 예조 좌랑권득기(權得己)의 형이다. 또 서고(徐固)의 외손자이고, 정지임(鄭之臨)의 사위이다.

은둔 생활

1590년(선조23) 부친상을 당하고, 1601년(선조34)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하면서 예제(禮制)를 다하다가, 지나치게 몸이 야위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은둔(隱遁)할 뜻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충청도 문의현(文義縣) 형강(荊江)의 상류 노산(老山) 아래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집안은 겨우 무릎을 펼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만큼 허술하였다. 때로는 밥을 짓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으나,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형제와 친족들이 더러 가난한 생활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벼슬하라고 권유하면, 그는 말하기를, “사람은 제각기 뜻이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사는 치휴(恥庥)정선(鄭瑄)과 벗을 삼아, 상쾌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뜨면, 서로 배를 타고 찾아가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시주(詩酒)로 회포를 풀어, 즐기면서 세상 걱정을 잊고 살았다.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에 정통하였는데, 존성(存誠)을 근본으로 삼아 궁리(窮理)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우 만회(晩悔) 권득기도 형을 위대한 유학자로 추앙하였다.

묘소와 묘비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천천리(泉川里)에 있는데, 윤증(尹拯)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경와집(敬窩集)』
  • 『외재집(畏齋集)』
  • 『제산집(霽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