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부일체(宮府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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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재정을 정부의 일반 재정과 함께 운영하여 국가 재정의 자의적 지출과 남용을 방지하도록 하는 이념.

개설

궁부일체론은 왕과 그 일족의 모든 일을 파악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왕실의 전제성과 자의성을 방지하고자 한 동아시아 왕조 국가의 이념적 지향점 중 하나였다. 조선왕조는 전 국토와 신민(臣民)을 통할하는 왕토사상(王土思想)으로 보편적이고 일원적인 지배 원리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보편적 원리를 구현하는 중심에 왕이 위치해 있었고 그만큼 왕은 사심이 없는 공적 지배의 주재자로서 역할이 부여되었다.

궁부일체(宮府一體) 이념은 특히 왕의 사유재산에 통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궁부일체 이념으로 인해 왕실 재정과 정부의 일반 재정을 함께 운영하여 왕실이 국가 재정을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양란 이후 왕실과 궁방의 재정이 확대되면서 이에 대한 견제와 비판의 논리로 궁부일체론은 더욱 부각되었다.

내용 및 특징과 변천

궁부일체는 『주례(周禮)』의 ‘총재(冢宰)의 직은 지극히 높다. 그러나 궁중의 비빈 이하로부터 음식·의복 등 조그마한 일까지 맡는다.’는 구절에서 그 이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궁부일체의 용어는 제갈량(諸葛亮)의 빼어난 문장인 「전출사표(前出師表)」에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가 되어 상벌의 시행을 달리하지 말아야 한다[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라는 구절에서 연유한다.

조선왕조는 이른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린다[代天理物]’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왕을 원리상으로는 모든 신민을 직접 상대하고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전제군주이자 가부장적인 존재로서 위치 지웠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중세사회에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왕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공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왕실 가문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이중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왕은 물론 그 일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궁부일체 이념은 왕실이 국가 재정을 자의적으로 지출하거나 남용하는 행태를 방지하는 일종의 이념적 장치였다. 선초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궁중의 비밀이나 빈첩(嬪妾)들이 왕을 모시는 일, 내시들의 집무 상황, 왕이 타고 다니는 수레나 말, 의복과 장식, 왕이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오직 총재만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왕실 재정에 대한 관리와 통제의 당위성을 명확히 천명하였다.

조선왕조가 고려의 각종 왕실사장고(王室私藏庫)를 계승하고 공상제도(供上制度)와 진상제(進上制)를 정비하여 운용한 것은 모두가 왕의 소유와 경비인 국가 재정으로 왕실 일가의 일상 비용을 충당하며 그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왕실의 사재(私財)는 존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왕실에 지원되는 재정의 액수가 풍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료의 간섭과 통제가 심하였으므로 왕실의 사사로운 쓰임새와 권위 유지에 필요한 재원이 요청되었다. 특히 과전법 체제의 해체 이후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가 사라짐에 따라 왕실은 독자적으로 재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늘어난 궁방전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었다. 왕실과 궁방의 수입원은 어전(漁箭)·염분(鹽盆)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궁방전이라는 형태의 토지 수입은 그 비중이 가장 컸다. 이러한 왕실 재정의 팽창은 국가 재정을 크게 위협하였고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의 이념적 근거는 역시 궁부일체의 논리였다. 궁부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왕실의 사장(私藏)으로서 궁방전 확대는 왕의 공적(公的)인 위상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실 재정에 대한 비판은 궁부일체론을 통해 공적 지배질서의 중심인 왕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그에 걸맞은 조치를 촉구하는 데 있었다.

한편 왕실 재정을 둘러싼 또 하나의 쟁점은 내수사(內需司)에 관한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 규모나 기능이 비교적 단순했던 내수사는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규모와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다. 내수사에 대한 비판은 궁부일체에 입각한 왕의 위상을 고려할 때, 내수사의 존재 자체가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점으로 모아졌다. 이에 내수사의 폐지를 주장하는 신료들의 지속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궁부일체론에 입각한 신하들의 공세에 대해 왕들은 이를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논의 자체를 미루거나 시간을 끌면서 쟁점이 흐려지도록 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숙종실록』 14년 4월 23일].(기사 못 찾음. 태깅 오류 『숙종실록』 생략) 실학자들도 궁부일체론을 근거로 내세우며 왕실의 사적인 재정 운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유형원(柳馨遠)의 경우, 이이(李珥)의 내수사 혁파론을 지지하면서 왕실 재정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을 촉구하였다. 정약용(丁若鏞)도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왕실 관련 업무를 이조(吏曹)로 대폭 이양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역대 왕 가운에 정조(正祖)는 궁부일체의 이념을 선점하고 이와 관련된 왕실 재정의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존재였다. 정조가 궁부일체의 이념을 표방하면서 추진한 왕실 재정의 개혁은 첫째, 왕실 재정을 대거 국가 재정의 중추인 호조가 흡수하거나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공적 재정 운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 둘째 내수사의 운영을 정규 행정 기구와 밀착시켜 재정 운영의 자의성을 줄이는 한편, 진휼 등 공공 부문에 대한 지출을 늘려 공적 재원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한 것이었다. 셋째는 비총제(比摠制)의 적용을 통해 궁방전과 노비신공(奴婢身貢)의 총액을 설정함으로써 예산 규모의 적정한 관리를 꾀하였으며, 넷째는 관료제 및 군현제의 질서에 왕실 재정의 수취 과정을 편입시키려 하였다.

조선왕조의 왕실 재정이 사적인 성격을 완전히 폐절하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수준의 공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왕실 재정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통해 형성된 정치적·제도적 긴장 관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궁부일체는 이러한 정책의 이념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반계수록(磻溪隧錄)』
  • 『경세유표(經世遺表)』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수환, 『조선전기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0.
  • 김태영, 「조선시대 농민의 사회적 지위」, 『한국사시민강좌』 6, 1990.
  • 송양섭, 「약천 남구만의 왕실재정개혁론」, 『한국인물사연구』 3, 2005.
  • 송양섭,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과 ‘궁부일체’론」, 『대동문화연구』 7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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