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문(具人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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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인문 |
한글표제 | 구인문 |
한자표제 | 具人文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정일영 |
자 | 장숙(章叔) |
호 | 수옹(睡翁) |
시호 | 충장(忠莊)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09년(태종 9) |
사망 | 1462년(세조 8) |
본관 | 능성(綾城) |
주거지 | 서울, 충청남도 당진 |
묘소소재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봉생리 248 |
증조부 | 구해(具核) |
조부 | 구서진(具瑞珍) |
부 | 구현좌(具賢佐) |
모_외조 | 광산 김씨(光山金氏) : 김린(金藺)의 딸 |
형제 | (1자)구숙통(具淑通), (2자)구숙문(具淑文) (1녀)? |
처_장인 | 영동 김씨(永同金氏) : 김량(金諒)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구효근(具孝謹) (1녀)여효보(呂孝輔)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인문(具人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5년 2월 27일, 『문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문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문종실록』 즉위년 10월 30일, 『문종실록』 즉위년 11월 4일, 『문종실록』 즉위년 11월 6일, 『단종실록』 2년 4월 26일, 『세조실록』 5년 7월 13일, 『정조실록』 15년 6월 5일, 『문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정조실록』 15년 3월 5일 |
총론
[1409년(태종 9)~1462년(세조 8) = 54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교리(校理),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 등을 지냈다. 자는 장숙(章叔)이고, 호는 수옹(睡翁)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충청남도 당진이다. 구존유(具存裕)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고려 말에 사재감(司宰監)판사(判事)를 지낸 구현좌(具賢佐)이며,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고려 때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던 김린(金藺)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판령주부(判寧州府)를 지낸 구서진(具瑞珍), 증조할아버지는 총판(摠判)을 지낸 구해(具核)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맹인 행세를 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26년(세종 8)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41년(세종 23) 33살의 나이에 식년문과 정과로 급제했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번암집(樊巖集)』] 급제 뒤 집현전 교리로 임명되었고, 이후1950년(문종 즉위년)에 사간원 좌정언에 임명되었다.[『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정조실록』 15년 2월 27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이때 조정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성터를 알아보기 위해 대신(大臣)을 파견하려 하자 세 차례나 이를 반대하고 낮은 직책의 인원을 파견하자고 주장하였고, 절에서 나무를 가져다 쓰고 초둔(草芚)을 대납하며 절에 부녀자들이 드나드는 일을 비판하며 그것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간언하기도 했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또 불교 사찰의 폐단에 대해 강력하게 간언하고 여성의 사찰 출입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는 등 유교적 가치를 엄격하게 추구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30일) 부사(府使)나 현감(縣監)을 바꾸는 인사 문제에 있어서도 두 차례나 연이어 반대하는 간언을 하는 등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4일),(『문종실록』 즉위년 11월 6일)
1954년경(단종 2)에는 청주판관(淸州判官)으로 있다가, 죄를 지어 잡혀온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죄명은 분명치가 않다.(『단종실록』 2년 4월 26일) 세조 대에는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임명되었으나 임지(任地)에 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관직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5년 7월 13일) 그러나 세조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후에는 절개를 지켜 “세상이 맑아지면 내 눈이 자연히 떠질 것이다”라며 맹인 행세를 한 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번암집』] 이러한 일로 정조(正祖)대에 이조 판서(判書)로 추증되었고,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6월 5일),[『일성록(日省錄)』],[『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성품과 일화
구인문은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海美) 봉생산(鳳生山)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그의 모친은 빛이 자욱했다가 사라지는 태몽을 꾸었다.[『번암집』] 사간원 좌정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늙은 아버지를 직접 모시겠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이런 강직한 성품에도 구인문은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문종이 밤에 집현전의 신하들을 불러 술을 베풀었는데, 밤이 깊어 날씨가 싸늘해지자 담비로 만든 이불을 하사하며 자신의 옆에서 자도록 하였다고 한다. 채제공(蔡濟恭)은 이를 두고 “이런 은영(恩榮)은 세상에 흔치 않은 일”이라 평했다.[『번암집』]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친분이 있던 성삼문(成三問)이 자신은 조정에 남아 벼슬을 하겠다고 말했으나, 구인문은 벼슬을 버리겠다고 답했다 한다. 또 구인문이 벼슬을 버린 뒤, 성삼문이 찾아와 단종의 복위 계획을 말하니, 그것이 오히려 단종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불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성삼문 등이 참여한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자, 매우 슬퍼했다 전한다. 단종 사후에 그는 종종 온천에 목욕하러 간다는 핑계로 홀연히 영월로 가서 단종에게 문안을 드렸다 한다.(『정조실록』 15년 3월 5일),[『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번암집』] 당시 그가 은둔했던 해미 봉산리를 훗날 사람들이 두문동(杜門洞)이라 칭하기도 하였다.[『번암집』]
묘소와 후손
구인문의 묘소는 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봉생리 248번지에 있다. 부인 영동 김씨(永同金氏)는 김량(金諒)의 딸이로, 1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구효근(具孝謹)이며, 1녀는 호군(護軍)여효보(呂孝輔)의 처이다.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번암집(樊巖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홍석표, 「충장공(忠莊公) 구인문(具人文) 연구」, 『내포문화』15, 당진향토문화연구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