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고강(校生考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향교의 교생을 대상으로 한 경서 암송시험.

개설

각 국가기관이 경쟁적으로 소속 군역(軍役) 및 정역(定役)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군안(軍案)에는 오히려 도망, 사망, 노제(老除) 등의 사유로 빠져나간 궐액(闕額)이 많았으며, 이를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한편 군역을 피해 도망한 자들이 향교로 모여들었는데, 이로 인해 교생(校生)이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 향교 교생은 경서 암송시험을 치렀는데, 이때 떨어진 교생을 낙강교생이라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낙강교생에게 양역을 부과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교생고강은 본래 독서와 학문 수련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초기부터 권장되었다. 그런데 16세기 들어 군역 회피 현상이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교생고강법이 추진되었다. 교생고강법이 추진된 배경에는 향교에 향리나 군역자의 자제가 들어가게 되면서, 기존에 향교의 주축이던 지방 사족(士族)의 자제들이 이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교생으로서 고강에 통과하지 못한 자는 4조(四祖) 가운데 현관(顯官)이 없을 경우 수군(水軍)에 채워 넣는다는 규정이 병조의 사목 내에 마련되었다. 하지만 1557년(명종 12)까지도 낙강교생을 수군에 채워 넣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교생은 사족이 대부분인데 만일 고강에 통과하지 못한 자를 모두 수군으로 정한다면 자손 대대로 영원히 천역(賤役)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명종실록』 12년 10월 21일).

지방의 사족 자제들은 서울의 사학(四學)에서 유생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인 청금록(靑衿緣)을 모방하여, 나름의 청금록을 작성하고 과거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군역과 교생고강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숙종 이전까지 확산되었으나, 17세기 말 이후로 양정(良丁)을 확보하려는 정책이 강력히 추진되면서 교생고강도 강화되었다.

변천

1676년(숙종 2)에는 병조에서 양역 대상자의 연령을 11세까지로 하향조정하는 등, 양정수괄(良丁收括)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을 중앙에 건의하였다. 여기에서도 교생고강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숙종실록』2년 6월 15일). 도사(都事)가 주관하는 경전의 강독시험에서 교생이 세 차례나 불통(不通)을 받으면 교생에서 떨어뜨려 군역에 충정한다는 내용이었다.

18세기에는 비변사의 절목에 따라 수령이 직접 경전의 강독시험을 주관하여 군역자를 충정한다는 내용으로 임금의 재가가 내려졌다. 낙강하면 곧바로 떨어뜨려 군역에 충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지방관이 관아나 향교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시험을 면해 주는 면강첩(免講帖)을 발급해 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박연호, 「인조(仁祖)-숙종년간(肅宗年間)의 군역(軍役)과 교생고강(校生考講)」, 『정신문화연구』 28, 1986.
  • 최광만, 「조선후기(朝鮮後期) 『청금록(靑衿錄)』 재고(再考)」, 『교육사학연구』19권 1호, 한국교육사학회, 2009.
  • 강성희, 「17세기(世紀) 교생고강(校生考講)의 제도화(制度化)와 그 운영(運營)」,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관계망